루터 선집
루터 선집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다 보니 마르틴 루터의 사상과 종적을 되새기고 기념하는 책이 많이 나옵니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가이고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빼어난 문장력을 통해 주옥 같은 저술을 많이 남긴 문필가이기도 했는데요. 정작 그의 본거지였던 독일에서도 "전집" 출간이 아주 활발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존 딜렌버거 학장은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데 오래 전에 루터의 전집 출간을 뜻깊게 기획한 분이고, 이 책은 그 일부를 한국어로 정성스럽고 정확하게 번역한 "선집"입니다(전집은 전집대로 있고, 이 책은 처음부터 "선집"의 성격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그 두께도 상당하지만 폰트 크기도 꽤 작은 편이라서 완독하는 데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번역은 이형기 교수님의 솜씨입니다. 워낙 저술, 변역 활동이 왕성하신 분이지만 어딘가 낯익다 싶은 느낌을 받는 분도 있을 텐데, 1994년에도 이 책은 제목을 달리하여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다이제스트 社의 사명도 바뀌었고 이곳에서 출간하는 고전 시리즈도 산뜻한 디자인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 새로 한 권을 소장하는 것도 뜻깊지 싶습니다. 예전 텍스트다 보니 예컨대 p16: 밑에서 아홉번째 줄을 보면 "아이제나하" 같은 표기가 눈에 띄긴 합니다(현행 표기법대로라면 "아이제나흐"). 외래어 표기법뿐 아니라 용어 사용례도 다소 예스러운 느낌이 드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정확한 옮김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본문(물론 마르틴 루터 본인의 저술)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저자 서문에서도 다시금 강조되듯, 루터는 참으로 강직하고 한번 형성한 신념을 완강히 내세우는,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적과 비판자를 많이 낳기도 했는데, 서문에서는 상세하지는 않아도 그런 적수들이 그에 대해 어떤 평을 했는지도 잠시 짚습니다. 저자의 평가는 그들을 신랄히 공격하지는 않아도, "이제는 교조적인 태도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평가합니다. 돌려말하면 "판에 박힌, 이미 설득력을 잃은(루터 지지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재반박됨으로써)" 지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이죠.
신학의 본고장에서는 구교든 신교든 혹은 제3진영이든 과거의 낡은 공방은 이미 발전적 타협이나 상호 승복이 많이 이뤄진 편이고, 대립보다는 화해와 포용이 더 강조되는 분위기이며 이 책도 그런 기조를 상당 부분 반영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예컨대 칼 바르트 같은 이가 "독일 특유의 이교적 돌출로서 20세기의 히틀러 숭배 현상과 비견할 만한" 같은 언명을 한 건, 읽으면서 매우 당혹스러워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런 언사가 지나치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종교개혁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일정 부분 반영했다는 일말의 진리를 분명히 지적한 셈이니 말입니다. 물론 책의 기조는 (당연히) 극단적으로는 이런 견해도 있다는 정도의 취지입니다.
루터는 그저 자신만의 단색적 확신에 가득찬 평면적 지성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대단히 명료하고 논리적인 사고로 기독교 신학에 커다란 방법론적 기여를 남긴 천재형에 가까웠습니다. 예컨대 그는 교황청 측과 오랜 공방을 거치면서 논박하기를 "교회가 성경과 동일한 위계의 권위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이른바 sola scripta), 그 공의회 문서라는 것들도 서로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여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물론 문헌이란 문언(Wortsinn) 자체만 놓고 볼 게 아니라 그 맥락과 해석을 어떻게 파악하는지가 또한 중요한데, 상대의 주장을 공박하며 자체 모순을 지적하는 건 그가 광폭의 지지와 설득력을 얻어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편자 딜렌버거 박사는 루터의 저술을 현대적 의의로 해석함에 있어(해석일 뿐 아니라 독일어에서 영어로의 번역이기도 합니다) 루터 고유의 용어례를 여러 다른 개념으로 적절히 치환하여 수용할 것을 권하는데, 이를테면 "칭의"보다는 "은혜"와 "자유"로 바꿔서, 혹은 확장하여 받아들이자는 제안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제안은 본문이 아니라 편집자 각주(이 책의 원주)에서 등장하는데, 물론 본문 격인 서문도 딜렌버거 박사 본인의 저술이므로 그 기조는 서로 같습니다. 이에 대해 찬반 양론이 갈릴 수 있지만, 루터 역시 성서 그 자체의 권위를 지닌 위인은 아닌 만큼 후대인들이 얼마든지 시대 상황에 맞게 포용적으로 재해석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편집자의 주장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서문은 이 선집 출간 기획을 주도한 딜렌버거 박사의 서문도 있고, 마르틴 루터가 생전에 이미 나왔던 라틴어판 "전집(물론 자신의 저술)"에 붙인 서문도 따로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라이프치히 토론의 맞수였던 에크(에키우스)의 태도와 거동에 대해 개인적 평가와 회고를 잠시 펼치는데, 개인적 만남이나 토론장에서의 공식적인 회동에서나 그에게 그리 좋은 인상은 못 받은 듯합니다. 여튼 그는 토론에서건 한 인간으로서 당당한 처신으로건 신학적 입장의 완결성에 관해서건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딜렌버거 박사가 루터 저술 속의 "자유"가 뜻하는 바에 대해 간략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재정립의 의도를 표현했지만, 루터 본인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료하고 시원하게 답한 논문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또한)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루터 자신도 메타적으로 언급하듯 이 두 문장은 외연상 서로 모순되는 언명입니다. 허나 이미 루터의 사상(나아가 그리스도교 전체의 노선)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 두 명제가 전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신묘한 일치를 이룸을 잘 납득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적절하게도 빌립보서(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2장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을 입은" 자유자이자 동시에 종이었다며 자신의 결론을 보다 선명히 밝힙니다.
루터는 위대한 주석가이기도 해서 기독교 성경 본문에 대한 그의 해석과 설명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학습의 주요 참조 교재 노릇을 합니다. 그가 신도와 독자들에게 특히 주목하기를 청하는 세 요소는 첫째가 믿음이요 둘째가 그리스도, 셋째가 전가(轉嫁. imputation)입니다(p159). 마지막 요소 "전가"에 대해서는 책 저 앞 p49, 라틴어 전집 서문에도 잠시 언급됩니다. 이 세 요소가 서로 따로 떠돌아서는 안 되며, 언제나 참된 믿음 안에 하나로 결합해야 함을 그는 누누이 강조합니다.
이성이 권위와 무지몽매를 극복하고 대중의 계몽으로 나아갈 것을 주창하던 시대 또 한 명의 거물이었던 에라스무스(에라스뮈스. 이하 이 책의 표기를 존중합니다)와 주고받은 공방, 혹은 루터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퍼부은 날선 공박도 이 선집에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도 수시로 상기시키듯 뛰어난 지성을 지닌 에라스무스였지만 교황이나 황제, 혹은 귀족들과의 대립각 세우기를 매번 회피해온 게, 온순한 성정을 타고난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강한 권세와 무력을 지닌 진영뿐 아니라 붓으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한 루터 같은 매서운 논객과의 대립도 그는 가능하면 피하려 들었는데요, 이 논문은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는 그에 대해 자존심을 정면으로 자극하여 논쟁의 장으로 유도하고, 나아가 썩은 구체제의 혁파 대열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목적이었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형식상으로 에라스무스의 저술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박 구조를 취하며 준열하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본디 "누구의 어떠한 책에 답하다" 같은 포맷은 고대 그리스 이래 뛰어난 사상가들이 즐겨 취해온 저술의 한 형태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논문의 제목은 "노예 의지론"인데, 물론 노예에게 의지가 있을 리 없으므로 신랄한 패러디 기법의 일환이겠습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푸르동의 책 <빈곤의 철학>에 대해 <철학의 빈곤>을 써서 통박한 사례나, 하이에크의 <노예에의 길>에 얽힌 전후 사정도 함께 떠오르는 듯하고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에 찬 주장을 기뻐하여야 한다!"라든가, 로마서 10장과 마태 복음을 인용하며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confess)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며" 같은 문장에서의 "시인"과 이를 같은 맥락으로 연결합니다. 책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만 관련 구절에는 "(반대 개념으로) 부끄럽게 여기며"도 나오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이 부족하면 이는 곧 자신의 믿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시인?)이나 마찬가지라는 함의도 은근 담는 구절입니다. 루터의 숭고한 확신은 물론 존중되고 높이 받들어져야 마땅하나, 이를 현대인의 여타의 비 신앙적 지적 소통과정에 무비판적으로 도입하는 것도 또한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루터 하면 또 야고보서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유명하죠. 이와 관련 그는 저술에서 "이전에 나는 야고보서를 거부하였지만 이제는 높이 평가하며 가치있는 것으로 본다"고 표방하여, 혹시 (그럴 리가 만무하지만) 이 문장이 일종의 recantation이 아닐까 잠시 눈을 비비고 열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니었고요. 그는 근본적인 입장의 수정 없이 "사도적 입장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는 선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러 교양서에서 읽어 알듯, 그는 이 책이 칭의를 "행위"에 의한 것으로 돌리는데 이는 성서의 다른 교의와 상치된다고 판단합니다(물론 그의 입장이며, 현재는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많은 견해와 해석상의 변화가 자리잡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이 책이 부활, 수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나 그 어떤 회상을 담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어떻게 고립된 이 한 사람의 기자(記者)가 성서 전체와 바울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라며 포효하는데, 솔직히 사도 야고보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빌론 유수(이 책에서는 "포로"라는 표현을 씁니다)를 빗대어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성경에 상치되는 독단적 교리가 믿음의 성도들을 타락하고 사악한 로마의 포로가 되었다는 뜻으로 준엄한 비판을 내놓습니다. 물론 이보다 앞선 시기에 있었던 "아비뇽 유수"도 같이 떠오르죠. 이 글에서 루터는 로마 교회의 7성사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그 타당성과 권위를 공격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야고보서 5:15가 언급되며 이 범위 안에서 그가 야고보서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도 마련되지 않았겠습니까.
세속의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는 참으로 민감한 이슈입니다. 편자 서문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는 농노 해방이나 사회적 계급 철폐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는데, 편집자의 해설(또, 우리 시대의 중론이기도 하지만)로는 사회에 전적인 무정부상태가 도래하는 결과를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어떤 진리가 앞에 놓여 우리의 눈을 밝히는 건 물론 엄청난 축복이지만, 어디까지가 정의와 자유를 위한 확신이며 어디서부터가 광신, 독선인지 판단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루터의 지혜가 가득 담긴 이 책이 우리에게 그런 한 이정표를 마련해 주길 기원하며, 먼저 어리석은 우리 자신들의 정신이 개안(開眼)되어야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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