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패리시 부인
마지막 패리시 부인
책 표지에 보면 <퍼블리셔스 위클리>誌의 서평 한 구절을 인용하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미스터 리플리>라든가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등과 이 작품을 비견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교활하고 타산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만신전("복마전"이 더 맞겠죠?)에 우리 앰버 님도 이름을 올릴 만하다는 건데, 사실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늘어놓으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그 평론가나 일개 독자인 저나 그 정도까지밖에 말을 못 하겠지만, 사실 리플리 군과 버드 콜리스의 내공과 자질과 성취(...)에는 이 앰버가 한참 못 미치죠. 뭐 탐 리플리나 버드나 결국 실패자들이라는 점에선 별반 '텔런티드"하지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아이쿠 이거 두 장르물 고전을 한꺼번에 스포일링하다니)
장르물에서 사이코패스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비열하게 약자들을 갉아먹고 사는 유형이며(이 정도나 되면 차라리 괜찮은데 머리가 워낙 멍청한 탓에 지가 되레 뒤통수를 맞고 이불킥하는 찌질이도 있죠), 다른 하나는 인간성과 양심을 애저녁에 포기한 채 사회적 신분 상승 사다리를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며 사기극을 벌이는 유형입니다. 전자는 아니고 전자 기분을, "흉내를" 내어 보려는 저능아들 중에 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후자의 유형에 억지로 세팅하고 찌질한 쾌감을 느껴 보려는 저능한 유형도 있는데, 그 중에 몇은 후자한테 잘못 걸려 돈도 털리고 전과자가 되는 극히 한심하고 처량한 운명을 맞기도 합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누구하고 누구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만약 그렇다면 이 서평은 몹쓸 스포일러죠), 여튼 두 유형의 잘못된 인간이 외나무다리에서 조우할 때 어떤 비극, 아니 코미디가 벌어지는지 잘 보여 주는, 근래 양산되는 사이코패스물의 뻔한 궤도를 지적으로 비틀어 독자에게 쾌감을 안기는 작가의 재치가 빛나서 좋았습니다.
앰버(일단 이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는 외모나 자질 면에서 아주 선택받은 사기꾼 재목(...)은 못 됩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후반부에 나오는 누군가의 평가를 빌리자면) 자기 도취에 빠진 면이 있어서 일을 어설프게 하면서도 자신은 꽤 잘한다고 착각하는 타입 같습니다. 혹은, 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투사(projection)"라고 해서, 지가 그러면 남도 덩달아 그런 줄 알고 자신의 미숙하고 모자란 생각을 남의 것으로 엉뚱하게 전가하는 습관, 자다가 봉창 뜯는 헛소리 잠꼬대에 물든 타입이기도 합니다(그래서 그 나름 꽤 그럴싸한 재주를 지닌, 위 고전 두 캐릭터와는 나란히 놓으면 좀 곤란하다는 거고요). 앰버는 그리 성공적인 사기꾼이 못 되었는데도(못 되었기 때문에 이런 늦은 라운드까지 밀린 거죠) 예의 자기도취에 빠져 인성은 인성대로 망치고(잘못된 인간이긴 하나 아직 한 조각 양심이 남아 있고 오히려 그것때문에 더 초라하게 보입니다) 어설픈 계획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반면 그녀가 등쳐먹으려는 대프니는 우리 독자들이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고상한 인물입니다. 무난한 성장 과정을 거쳤고 양친도 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어서, "저분 참 괜찮군." 같은 평가를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내려도 되는 착한 여인이죠. 서양의 명명 방식과 숨겨진 뜻에 쥐뿔도 모르는 얼치기의 단견으로는 전혀 짐작을 못했겠지만(근본 없는 싸구려 상식을 함부로 갖다붙이는 억지 견강부회야말로 이 땅에서 속히 peish되어야 할 적폐입니다), "대프니"라는 이름부터가 전형적으로 이 소설 속의 대프니 같은 우아하고 착한 여인을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입니다. 짧은 상식과 천박한 속물 심리에 쩔어 있는 인간은 짐작도 못할 사항이죠.
OOO은 과연 사이코패스인가? 사실 이 작자가 아주 악질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빈틈없이 치밀한 두뇌를 지니고 뭘 벌이는 타입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현실에서 종종 목도되는, 이 축에 끼지도 못하면서 뭘 흉내낸답시고 돌아다니는 저열한 종자들에 비하면 거의 신이지만 말입니다). OOO은 그저 분수에 넘게 풍족한 환경에서 버릇이 잘못 들어 자신을 지옥에 빠뜨린 좀 모자란 위인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합니다(그러니 자식들도 하나같이 복제품 만들듯 그따위로 키우는 거죠).
놈은 앞에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과장된 예의를 차리다가(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한없이 낮은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면 절대 날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반어법 주문을 강제하는 건데, 본인이 한없이 낮은 인간이라는 건 본인이 너무도 잘 안다는 뜻도 되죠ㅋ), 뒤로 돌아서면 온갖 험담과 지저분한 폄하를 일삼는, 거의 정신병 수준의 이중인격자입니다. 이중인격도 무슨 구체적 목적이나 있어서 부리는 수작이면 누가 뭐라고 할 건 못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제 존재를 엄습하는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망각해 보려는 반사적 몸부림의 산물에 불과하니 딱하고 불쌍하다는 말이 나올 밖에요.
OOO은 여튼 미국 부유층들의 습관은 충실히 모방하여 미술품, 문학 등에 대한 폭 넓은 소양을 자랑하긴 하며, 유창한 프랑스어 구사가 신분 유지에 필수 조건임을 강박적으로 내세우는 등 무슨 흉내를 내어도 제대로는 내어 보려고 애씁니다. 허나 일부 졸부의 자식들은 어디서 배워도 밑바닥 사기꾼 흉내를 어설프게 익혀 그딴 걸 세상사 스킬이나 구사하는 듯 착각을 하니 이걸 보는 입장에서야 그저 아연실색할 밖에요. 개탄을 해야 하는지 하염없는 동정을 베풀어야 하는 건지 원.
잠시 우리의 앰버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앰버는 물론 뭘 열심히는 합니다. 구경꾼들이 보기에 눈물겹도록 말이죠. 하지만 사고 방식이 너무도 미숙한데(사기를 치려면 최소한 본인 자신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확실히 서야 합니다), 예컨대 아무 잘못 없는 부친을 성폭행범으로 팔면서 "자기 세탁소에 애들 일 시킨 건 아동 학대 아님?" 같은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부모는 아이가 성장한 후 18년 동안의 학비와 분윳값을 청구해야 마땅할 겁니다. 그런가하면 본인은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호구로 물으려 든 잭슨 패리시에게 고혹적인 셀카를 보냈다고 착각하지만, (책 한참 뒤에 나오는 OOO의 반응은) "그 생쥐 같고 촌스러운 화이트 트래시(책에서는 적절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설픈 자기 도취에 빠지면 이처럼 실상이 안 보이게 마련이죠.
1부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대프니에 대해 엄청 동정할 수도 있고, 반대로 경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착한 것도, 악인의 먹잇감이 되어 사화악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이 두 반응은 모두 타당하며, 관점이 다른 독자들이 결말에 가서 두루 (각자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게 작가의 센스고 재능이었습니다. (구체적인 건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해들 주시고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조금만 스포하겠습니다. 곤란한 분들은 이 아래부터는 보지 마시고요)
좀 이상하지 않던가요? 세상 어떤 여자가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그럭저럭 약은 데다 적절히 볼 만은 한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나 "많은 자리"를 내어줄지요. 한편으로는 "자기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냥 내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가지고 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의도대로 일이 척척 풀리면 뭔가 의심을 좀 해 봐야 하는데 그냥 낙관에 빠져 즐기기만 하는 걸 보면 앰버가 참 어설픈 "소셜 클라이머"인 건 분명하지 싶습니다. 무조건 자기 편할대로만 생각하고 싶어한다고 할까. 1부를 보면 (이후) 그렇게나 잦게 찾아온 위기 징후가 그녀의 눈에는 조금도 감지 안 됩니다. 완전한 맹인과도 같습니다. 이래 갖고 누굴 등쳐먹겠습니까. 정작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대프니가 아니라 이 앰버인지도 모릅니다.
앰버는 수법이 참 빤하고 판에 박힌 타입이기도 합니다. 늙은 비서 배틀리를 사직하게 꾸미거나, 식모 마틸다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지나고 나서 보면 다 불필요한 음모이고 소동인데, 이런 단계에 이처럼 공을 들이는 걸로 보아 하층민 근성은 좀처럼 떨칠 수 없나 봅니다. <오디세이아>를 인용하며 자신의 처지를 텔레마코스에 비기는 것도 혀를 내두를 만한 무지인데, 속으로 (그 나름 공부 좀 했을) 잭슨도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만 본인만 눈치 못 챈 거죠. 그레그가 잭슨에게 나이 어린 걸로 한 방 먹인다 어쩐다 하며 본인만의 의미 부여, 과잉 해석을 열심히 시도하는데 이게 다 사기꾼으로서는 결격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세계에 빠져 혼자서만 허우적대는 거죠. 사이코패스는 철저히 상대방을 물건처럼 대해야 하는데 잭슨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빠져 버린 것도 그녀의 자질 하자(?) 중 하나겠습니다.
아무튼 결말에서 상식적인 독자에게 통쾌감을 선사하는 것도 좋고, 은연중 뉴잉글랜드 귀족들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며 독자에게 구경거리를 안기는 작가의 여유와 풍부한 상식도 돋보였습니다. 사이코패스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안 그런 앰버는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다고 하겠으나) 제 감정과 인격 하나를 못 추스려 스스로를 저런 지옥에 빠뜨린 버릇 나쁜 속물의 행각을 통해, 자본주의의 구리고 축축한 이면을 풍자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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