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영휴 사토 쇼고 장편소설
달의 영휴 - 사토 쇼고 장편소설
세상에는 알다가도 모를 신비한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 여튼 인간은 상식에 어긋나는 사태와 마주하여 보이는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방(p289)"이며 다른 하나는 "설명"입니다. 많은 경우 (시간이 좀 걸릴망정) 다양한 신비는 과학의 발전으로 해결을 보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릴 수 없을 때 성급한 우리 인간들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그건 종교 담론일 수도 있고, 신화일 수도 있고, 전생이니 빙의니 예지력이니 하는, 알고보면 그저 달콤한 몽상의 미로일 수도 있습니다.
시험삼아 한번 죽어 볼까? 루리라는 이름의 연상녀가 어느날 비디오가게 대여점 알바 대학생에게 찾아와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이 유부녀는 워커홀릭인 같은 또래 남성과 결혼하여 딱히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덩치도 크고 두뇌회전도 빠르고 성실하며 집념, 의지, 리더십 등이 탁월한, 어느 기업에서도 탐낼 만한 인재입니다. 루리가 불만을 가질 이유는 외적 조건 중에서는 없습니다만, 그녀는 마음 깊이 어떤 불안과 상실감에 시달립니다. "이 남자는 나를 진정 사랑하긴 하는 걸까? 미리 정해 놓은 타임라인에 맞춰 강박적으로 과시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한 부속품처럼 나를 이용하는 건 아닐까?" 루리 씨의 이 의심이 맞았다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이 마사키 씨(남편 이름입니다)는 저주 받은 속물, 속은 빈껍데기인 허수아비 인생을 여태 허우적거리며 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우리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루리 씨는 딱 두 번, 그 알바 대학생의 숙소에 와 같이 잠을 잡니다. 나중(p309)에 나오지만,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닥뜨려서, 마사키 씨가 보인 반응은 충격과 경악이나 참회나 부끄러움이 아닌, 복수심과 분노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리 좋은 사람 같지 않아 보이더군요.
환생과 불륜과 기이한 3자대면. 통속 소설에 딱 어울릴 만한 소재이지만 이 작품은 그리 흔한 장르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익숙한 소재를 쓰면서도 대체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꾸려질지 궁금해서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만듭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떨까가 궁금하다"기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쩌면 이처럼 기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여튼) 사연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늦으막한 나이 오사나이 씨를 아연하게 만든 건 당연하고, 식당 종업원조차 놀라서 주문 받는 일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입니다. "이 꼬마는 누구인가? 책가방도 못 들 자그마한 체구를 하고선 어른들이나 쓸 법한 말을 하고 지나치게 성숙한 감정까지 안색에 띄우는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사태를 피상적으로 봐도 충분히 당혹스럽습니다. 허나 오사나이 씨는 꼬마가 자신의 과거사를 줄줄 읊어대고 버릇 없는 충고까지 던져대는 통에 혼이 나가버릴 지경입니다. 그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독자 눈에 대단하게 보이더군요.
알고 보면 평범한 이야기라고 해도 묘하게 순서를 섞어 놓으면 의외의 참신함과 신비감이 느껴지곤 합니다. 하물며 (그게 가능하다면) 순서대로 상식에 맞게 재구성한다고 해도 기괴한 사연이라면, 듣는(읽는) 이들 입장에서 과연 어떻겠습니까. 유한하고 짧은 생에 비해 너무도 많은 감정을 키우고 부여잡고 살다 죽게 되는 우리들이니만치, 한 번 살고 재로 화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여겼는지,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는 관념, 가상을 잘도 멋대로 만들어 요리조리 꼬아서 공유하고 위안하고 때로는 이용(악용?)합니다. 소설은 여러 인물들, 대체 전생이라면 서로 어떤 인연으로 얽혔을지 모를 여러 "영혼들"을 등장시켜, 과거에 곤란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엮이던 과정에 남긴 한과 상처를 서로 보듬거나, 혹은 할큅니다. 전생이니 영혼 따위는 안 믿을,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각자의 삶을 힘들게 부대끼는 분들이라 더 공감을 할 만한 모습들입니다. "아 그러시면 안 되죠. 전생에 누구누구였다는 누구의 말이잖아요. 왜 거부(추방?)하고 그러세요?" 답을 뻔히 아는 우리 독자들도 세계의 바깥에서 마냥 이리 답답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우주에 이런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면 당연히도 저리들 나올 줄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p181엔 그런 말이 나옵니다.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 옵션을 주고 선택하게 했다. 나무처럼 자신의 씨앗을 틔워 후손이 계속 명맥을 잇게 할 건지, 아니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지며 거의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할지." 제목의 "달의 영휴"는 이 모티브와 관계가 있고, 이런 신화를 믿는 루리 씨는 정말로 나무가 아닌 달의 삶(죽음)을 선택합니다. 루리 씨의 죽음은 전철에서의 사고사였는데, 그녀의 죽음을 신문에서 접하고 안, 전에 그녀와 두 번 몸을 섞은 비디오 가게 알바생은 이것이 자살이었음을 직감합니다. 이 알바생은 이후 일본 굴지의 회사에서 한 번의 멈춤도 없이 출세 가도를 질주하는 일류 직장인이 되는데, 이력서에는 단 한 줄, 청년기 1년 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바로 비디오 가게 알바생 시절 루리 부인과의 만남과 관련된 기간입니다. 자주 만나거나 짙은 감정의 교류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단 두 번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은 그저 "기다림"으로 채워졌습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루리의 생전 남편이었던 마사키 씨 역시, 이후 알바생(미스미 군)의 인생처럼 직장에서 잘나가던 엘리트 사원이었으나, 아내의 자살이 무심코 던진 자신의 모욕적인 언사 때문이었다고 여기고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 새 직장을 구하고 인정도 받고(그의 능력을 과분하게 여겨야 할 회사) 타고난 기질과 몸에 밴 성실성이 있는지라 곧 예전의 안정된 생활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의 생(두번째 생?)을 다시 산산히 파탄낸 건 어느 꼬마였습니다. 사장의 여덟 살 먹은 딸 노조미는 어느날 마사키 씨를 찾아와, 전생에 그녀가 루리였음을 도무지 의심할 수 없게 하는 몇 마디를 던집니다.
사실 저는 읽으면서 조금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했는데, 생전에도 순종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부인이, 지금 환생(빙의?)하여 어린이의 몸을 하고서는 날카로운 계산과 상대의 심리를 훤히 읽는 능력으로 마사키 씨와 거래를 시도하는 장면이 조금은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착하고 순박한 영혼도 지독한 배신과 환멸을 겪은 후엔 마치 헐리웃 영화에 나오는 악녀들처럼 험한 세상에서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걸까요? 직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마사키 씨도 만만치 않아서 노조미 양(...)의 페이스에 마냥 말려들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는....
인생은 뜻대로 안 풀렸다고 해서 한 번 판을 접고 리셋할 수 있는 게임 필드가 아닙니다. 그런 불성실한 마음("이번 생은 망했고 다음부터 잘 하지 뭐.")을 품은 것만으로도 다음 생(그런 게 있다면)에서 형벌을 받을 구실이 충분해질지도 모릅니다. 생전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믿고 살 인물 자체가 아니었던 마사키 씨는, 착한 아내에게 몹쓸 말을 내뱉은 죄과로 (도피한 다른 무대에서조차) 결국 몹쓸 변을 겪게 됩니다. 성실하고 유능하게 부품 같은 몸놀림에 능숙하다고 해서 사람으로 할 의무를 다하는 건 아닐 겁니다. 나는 혹 내 곁의 선하고 정 깊은 이들에게 무심한 중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무관심으로 큰 상처를 입히지나 않았을까요? 소설에 따르면, 그런 업보는 생의 경계를 달리해도 쉽사리 씻기는 게 아닌 듯합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삶의 매 단계에서 진짜 신경 써야 할 미션은 따로 있었다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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