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생각으로, 예술, 혹은 그를 만드는 예술인들이란 우리 사회에서 근린공원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여깁니다. 곁에 없다고 해서 당장 목숨의 유지가 곤란한 건 아니지만, 없어도 살기야 얼마든지 살겠지만, 만약 없다면 삶이 참 피폐하지 않겠습니까. 광범위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서울 혹은 수도권을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아들 하는 거고, 집값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 되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예술인들의 삶이란, 예술이 한국 사회에서 대접받는 만큼 (종전에 비해) 향상된 바가 사실 거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대중 앞에 많이 노출되고 미디어를 통해 인정받은 극소수의 아티스트들은 사정이 크게 다르겠으나, 많은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실제 공헌도, 성취도, 잠재력에 무관하게 사회에서 거의 일률적으로 푸대접받는 게 현실입니다. 작년 9월 이낙연 더불어당 대표가 김수로 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현장(공연계)의 고충을 대변하여 전하는 말을 담은 뉴스를 읽은 적 있습니다. 사실 사무직, 생산직 노동자들의 아픔이나 애로라면 이를 제도적으로 대표하는 어떤 조직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사정이 낫습니다. 아티스트들은 온갖 어려움과 인식 부족 앞에 맨몸으로, 개인으로, 내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저자 명의인 "YAP"은 young artist power의 약칭이라고 합니다(p7). 강병섭, 고스, 권태훈, 김동욱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이 책에 실린 여러 꼭지의 글들을 써 이뤄진 책이더군요. 각 꼭지 말미에는 필자의 인스타그램 ID가 적혔기 때문에 관심 있는 분들은 웹상에서 다시, 깊이 있게, 작품으로, 이분들을 만나볼 수 있을 듯합니다.
책 앞부분 중에는 고스라는 분의 글을 관심 깊게 읽게 되었습니다. 미술의 본산지는 누가 뭐래도 프랑스 겠죠. 피카소도 스페인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고 파리로 건너와 여러 아티스트들과 교분을 나눈 끝에 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죠. 통속 소설가 시드니 셸던의 작품 <게임의 여왕>을 보면 주인공이 아들을 프랑스로 보내고서 그 예술을 향한 집착을 끊기 위해 모략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설적으로 예술가로서 대성하려면 아무래도 그 본고장에 가서 보고 배워야 한다는 점 다시 확인이 가능했죠. 뭐 원효 대사의 해골물 일화에도 나오듯 진정 뜻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불가능하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쉽지 않죠.
고스 님은 프랑스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아마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대화가 많다, 대화가 많다... 사실 저도 어려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유치원에서 미술 배울 때 "비 오는 건 이렇게 이렇게 그려야지!"라는 채근을 받고 좌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그려 놓고 보니 그럴싸하긴 합디다만 이런 주입식(미술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다니!) 교육 하에서 무슨 (창의력이 그 본질인) 예술이 싹트겠습니까? 지금도 저는 제 중요한 재능 하나가, 나쁜 교육 시스템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는 아쉬움을 거둘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미술은, 그 표현의 방식과 아이디어의 구체화를 놓고 마스터와 학생 사이에 끝 없는 토론이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서 그는 4차원 형상을 2차원 평면 위에 표현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가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 소양이 없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었죠. 우리나라처럼 천편일률적인 테크닉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거나, 해외의 트렌드를 어설프게 모방하고선 선생이나 학생이나 기만적인 에고를 달래는 식이 되어서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나올 수가 없죠. 예술가는커녕 간판장이들도 키우기 힘들다고나 할까요.
빅터 조 님은 강원도 영월 출신인가 봅니다. "어려서부터 씨름 선수는 유독 경상도 출신이 많은 게..."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특정 세대는 민속씨름(프로 씨름)이 인기 스포츠였던 환경에서 자랐기에 씨름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쳐도, 그 선수들이 경상도 출신이 많다는 점까지는 모를 수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이 참 독특하게 여겨졌네요. 사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천하장사를 지낸 장지영 씨, 또 한참 후의 박광덕 씨, 이런 사람들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죠. 다만 경상도의 왼씨름 방식이 해방 후에 표준으로 굳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게 최근 판명되고 있습니다. 여하튼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있어도 그런 자질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이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박훈 님의 이야기도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느꼈던 다크 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꼭 무슨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어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많이 탔다거나 이상하게도 음침한 공간에 필이 꽂힌 적이 많았다거나 하면 이런 성향이 생깁니다. 다크 한 감정을 끝없이 표현할 공간, 기회라도 생기면 그나마 다행이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지금은 이케아에서 일한다는 필자 박훈 님이, 뭐 직장에서도 크게 인정받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겠지만(그러고 있으시겠지만) 언젠가는 전업 예술가로서만 사회에서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버시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장은혜 씨는 "근 20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신" 분이네요. 여하튼 아직 젊다면 젊으신 나이이며, 예술혼이란 물리적 연령으로 측정할 건 아니겠으니... 대부분 이쪽 계통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졸업 후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더 오래" 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다시 공부를 계속한다거나,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으시고 현재 그러고 계신 그 열정, 충분히 공감합니다. "미친 듯이 투잡 쓰리잡 뛰어 독일 유학 갈 돈을 모았다." 그리고 한국의 직장도 계속, 종사하다가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고... 이 역시 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의 행보와도 비슷하죠(그는 딱 한 번에 자발적으로,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만둔 게 다르지만). 역시 준비의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직장 다니면서 고뇌했던 그 시간들도 다 준비의 자양분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필자 중 정진 님의 지인이 한 이야기는 참 묘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데, 너는 돈을 남한테 주고 전시를?" 이게 정확하게 평균적인 한국인(저 포함)들이 예술인들을 보는 시선의 수준입니다. 물론 예술가가 현실적인 수입을 (올려도) 올리는 건 전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시를 통해 (잠재적) 구매자와 소통을 한 이후가 됩니다만 말입니다. 몇 달 전에 코로나 재난지원금 1500만 원 지급으로 논란이 된 어느 분 아드님의 문제도 있었지만, 또 그분의 예술적 성취도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여하튼 이만큼이나 한국 예술인들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하나의 반증입니다. 필자께서는 무역회사를 한때 다니기도 한 분이고, "나의 경계"에 대해 어떤 실존적 고민을 한 분이기도 해서 이 부분 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노채영 님도 (본문에 나오듯이) 한 5년 정도 회사를 다닌 분입니다. 이 책에는 이처럼, 전업 예술가가 되고 싶어도 그리 되기 힘든 많은 (현실) 아티스트들의 솔직한 회고, 고뇌가 잔뜩 풀어져 있어 좋았습니다. 승무원으로도 근무하시고,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진로는 확고했었다"고 하시는 분이라 더욱 그렇더군요. "일은, 전업 작가로 버티기 위해서 하는 거다." 이렇게 일과 일 사이의 경계가 험난하니, 예술가가 자연히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실 고뇌하는 어느 영혼에게 적어도 그 고뇌의 시간만큼은 영원처럼 깁니다만, 성취 후 그 여유와 쾌감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촌음처럼 또 짧습니다.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적 소양도 없지만, 남이 한 일의 가치와 그에 담긴 노고를 평가할 만큼은 우리 모두가 좀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는 필자들의 작품이, 컬러 백상지에 선명한 사진으로 담겨 이를 감상하는 재미, 보람 또한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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