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람의 시간
마흔네 살에 그는 처자식을 한국에 두고 홀로 무작정 스페인 마드리드로 갔다. 잘 다니던 건축회사를 그만두고. 스페인어도 모르는 그가 낯선 곳으로 갔다. 처음 이 글을 읽으면서 서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가 떠올랐다. 그 소설 속 주인공도 아내를 두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났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그 정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길지 않은 공부를 마친 후 한국에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 유학이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정되어 가는 일과 자라는 자식들을 두고 언어도 모르는 먼 타국으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무모하기 그지없거나. 저자 김희곤은 불과 한두 해 전의 이야기를 이 책에 풀어내지 않았다. 2천 년대 초에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기록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하나의 사건이나 일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풀려나온다. 그래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낯선 나라에서 자신이 좌충우돌하면서 경험했던 것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흔하게 만나게 되는 여행 에세이나 재미 위주의 외국 체류기와 완전히 다르다. 글 속에 묵직함이 담겨 있어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집중하면서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단순히 스페인 체류기나 여행기를 기대했다면 잘못된 선택이다. 저자가 머물던 시기와 지금은 분명히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행의 정보나 도시 등의 정보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중년의 남자가 맨몸으로 현지에 적응하고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배우는 것의 어려움이다. 이렇게 적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 생활에서 이것보다 힘든 것이 없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고, 이것을 즐기는 젊은이도 많다. 하지만 중년이라면 어떨까?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대학원 등록까지 한다면? 비록 자신이 전공했던 분야고, 유창한 언어가 덜 필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읽는 내내 나의 현재와 계속해서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건축가다. 이 직업은 이 책을 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나온다. 그가 이전에 낸 책들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하다. 이런 직업병이 이 책 속에도 적지 않게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읽을 때 건축가들이 부럽다. 건축물을 보는 시각이나 방법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웅장하다 등의 수식을 넘어선 표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뭐 이런 것은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단하게 들려주는 가우디나 몇 명 건축가와 건축물에 대한 감탄과 그 의미 등은 나중에 스페인 여행을 할 때 하나의 안내도가 될 것 같다. 그의 글에서 가장 아슬아슬하면서 밋밋한 부분은 바로 열정적인 여자들과의 만남이다.
만약 그가 이혼을 하고 홀로 산다면 과연 여기에서 멈추었을까 하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중년이라고 하지만 아직 성욕과 열정이 남아 있는 나이를 감안하면 길지는 않다고 해도 잠시 동안 불꽃은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낭만적 추측일 뿐이다. 그가 묘사한 수많은 여인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아내의 편지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글을 넣어 이런 위험을 피해 간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조금 아쉽다. 무모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은 그의 용기는 대단하다는 감탄을 먼저 자아내게 한다. 그가 스페인에 머물면서 돌아다닌 곳과 경험한 것들은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며칠 동안 그곳을 머물다 혹은 지나간 것을 가지고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데 그는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배운 것 등을 함께 녹여내었다. 여기에 자신이 삶의 철학도 같이 곁들여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육신은 중늙은이지만 그의 열정과 삶을 대하는 자세는 청년과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 어쩌면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것인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안주하려고 하는 나 자신과 비교해서.
8월의 6일간
산행을 둘러싼 연작소설이다. 산악소설 하면 선이 굵은 작품이 먼저 떠오르는데 이 작품은 그런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마흔 살 즈음의 여성이자 문예지 부편집장을 내세워 등산의 즐거움과 그녀의 삶을 무겁지 않게 다룬다. 제목인 <8월의 6일간>은 마지막 단편이자 그녀가 8월에 6일간 등산한 것을 요약해서 알려주는 정보다. 다섯 편의 단편이 모두 이런 식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읽으면서 그녀의 일정과 시간을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각 단편 앞에 코스가 나와 있어 만약 이 책을 읽고 그곳에 가보고 싶다면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대학생일 때 지리산 종주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당시 친구가 한 번 가자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때 갔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곳곳에 들었다. 물론 그때 며칠간 종주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 그녀처럼 온천은 고사하고 늘 산장에서 자는 것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텐트와 침낭에서 자면서 며칠을 걸었다고 하는데 해보지 못한 경험이라 그런지 지금은 왠지 그것이 조금 부럽다.
그 후 다녀온 한국 산들은 모두 당일치기였으니 작가가 보여주는 몇 박 며칠의 등산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각 단편이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등산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화자가 본 풍경의 아름다움과 등반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먹은 음식 등이 반복되고, 그 사이사이를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놓는다. 짧은 기간의 등산이 아니다 보니 잡지 부편집장 일을 마무리한 후 휴가를 내어 갔다 와야 한다. 그래서 등산을 하기 전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도 같이 나온다. 이것이 등산하는 중간에 단상처럼 흘러가고, 산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과거의 인연들이 불쑥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등산이다 보니 같은 코스를 갈 때만 잠깐 같이 가고 분기점에서 자신들의 길을 간다. 인생의 한 모습과 아주 닮아 있다. 소설에 나오는 산들이나 봉우리 등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아마도 다른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두 번 정도는 본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몇 명의 중요한 인물들이 있는데 그 관계도 재미있다.
일상에서 그녀와 친밀한 후지와라 씨나 한때 연인이었던 하라다나 혼자 등산하다 만난 사향노루란 별명을 붙인 무 나가타 미치코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각각 현재와 과거와 등산의 인연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현실 속에서 뒤섞이면서 소소한 재미를 만든다. 몇 년 전에 헤어진 하라다의 결혼 소식이나 낯선 곳에서 만났을 때 감정의 흐름은 아주 묘하게 달랐다. 며칠 동안 하는 등산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소설 속에서 그녀가 싸는 짐을 보면 약간 놀란다. 아주 철저한 준비를 한 후 산을 올라가기 때문이다. 배낭의 크기나 간식이나 비상식량이나 물 등은 아주 현실적이다. 크게 공감하는 것은 오며 가며 읽으려고 들고 가는 책들이다. 내가 며칠 동안 여행을 갈 때 늘 이렇게 챙겨 가기 때문이다. 이전에 하루짜리 등산을 홀로 할 때 나의 호흡과 발걸음을 맞추면서 힘들게 산을 올라갔다 왔다. 고개를 지나 능선을 걸을 때 느낌이나 정상에 섰을 때 바라본 산의 풍경은 나도 모르게 산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가끔 마음이 복잡하면 이 등산이 생각난다. 스릴 넘치고 박진감 있는 등산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밋밋할 것이다. 하지만 등산에 약간이나마 관심이 있거나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털어버리고자 하는 독자라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낯선 지명과 밋밋한 등산 때문에 지루할 수도 있다. 작가가 곳곳에 드러내고 있는 섬세한 감정과 무리하지 않는 산행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잘 드러내어준다. 선이 굵은 산악소설들이 도전과 모험으로 긴장과 스릴을 가득 채웠다면 이 책은 그것을 벗어나 안정적이고 여성적인 감성으로 가득하다. 언제나처럼 이런 종류의 책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등산에 대한 열망에 불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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