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 소녀
박정윤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전처럼 한국 문학 단편집을 자주 읽었다면 그렇게 낯선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낯익은 책 제목이 딱 하나 있다. 제2회 혼불 문학상을 수상한 <프린세스 바리>다. 이 소설도 아직 읽지 않았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성장을 멈추고 거부하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란 소개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궁금했다. 당연히 밝고 경쾌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이 이처럼 상당히 몽환적이고 분열적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소녀들의 이야기도 어떤 부분에서는 섬뜩했고, 또 어딘가에서는 안갯속을 더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인데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다.
책을 받고 든 생각은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자신감은 첫 단편인 <초능력 소녀>를 읽으면서 무너졌다. 임신 후 결합 쌍생아란 판정을 받았는데 17주 차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서 일란성쌍둥이로 바뀌었다. 이 둘의 이름은 수와 화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 이 둘의 사연을 집어넣고, 수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친다. 미스터리 기법을 사용했지만 분명한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두 소녀의 등에 난 상처가 딱 맞물려 만들어내는 초능력이 작가가 책 끝에 말한 초능력과 살짝 연결된다. 그리고 화와 함께 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모습을 짧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단편집에 계속 나오는 것은 모호함과 소녀와 상처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보통이나 평범 같은 단어를 거부한다. <트레일러 소녀> 속 소녀는 허세를 부리지만 가슴 한 곳에 슬픔을 묻어두고 있다. 엄마의 불륜과 자살로 상처 받았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표제작 <목공 소녀>는 첫 장면에서 이상함을 느꼈는데 스스로 성장을 멈춘 소녀와 주변 인물들이 나온다. <소요>는 소요가 현재 어떤 모습을 가졌고 생활을 하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그녀의 현재가 불안하다.
이 불안감이 극에 달한 작품이 <파란 평행봉>이다. 자살을 시도하면서 관심을 가지려는 소녀와 화자의 관계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의 사연이 힘든 삶보다 행복한 죽음에 있음을 보여줄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기차가 지나간다>는 남아선호 사상과 장애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이 두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파국을 다룬다. 죽음 놀이로 자신들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소녀들을 보면서 애잔함을 느꼈다. <내 곁에 있어줘> 속의 소녀는 약을 팔면서 살지만 그 외로움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관계가 약과 돈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사이는 쉽게 매워지지 않는다. <미역이 올라올 때>는 처음에 쌍둥이 이야기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모와 조카라는 관계가 젊은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드러날 때 그들이 받은 상처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에 가슴이 살짝 아린다.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는 이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소녀가 주인공이 아니다. 하지만 이 중년의 남자 또한 상반신 화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도배를 하면서 일당을 벌어먹고 살지만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이란 환상을 품고 산다. 이 결혼이 성사된 후 삶은 또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희망도 관심도 없는 모습으로 그냥 살아갈 뿐이다. <초능력 소녀>의 ‘화’처럼 복수라는 감정이라도 지니고 살면 좋을 텐데. 이렇게 이 단편집은 나를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섬뜩함을 느끼고, 그 상처와 버림받음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종말 일기 Z: 암흑의 날(밀리언셀러 클럽 141)
전편에서 처절한 고생을 한 주인공이 이번에도 역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전편이 일기 형식으로 진행하면서 긴장감을 내면화했다면 이번에는 규모와 액션을 더 강화했지만 그 고생이 가슴 깊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일기라는 형식을 더 사용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생존 후 새로운 곳으로 오게 되면서 생기는 문제 등을 감안해서 여러 명의 시점으로 나눈 것 같다. 이 시점의 변화가 암시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만들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잘 표현했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원래 좀비 소설이 지니는 재미는 조금 약해졌다. 힘겹게 좀비들에게 탈출한 프리 첸코, 루시아, 세실리아 수녀, 화자인 변호사와 그의 고양이 루쿨루스는 헬기를 타고 생존자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은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 섬이다. 헬기의 부족한 연료로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도착한다. 최후의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검역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고가 생긴다. 알코올 중독자인 검역원이 세실리아 수녀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다. 그와 동료는 이 사건을 프리 첸코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바꿔치기한다. 이 사건은 프리 첸코와 주인공 변호사가 다시 대륙으로 나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친절하게 작가는 두 개의 요약을 통해 전편에 있었던 이야기와 어떻게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특히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은 인도주의와 욕망이 결합한 결과물임을 잘 보여준다. 최초의 대응 실패와 정보의 차단과 왜곡 등이 사건을 키웠고,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든 과학기술이 그 전염을 가속화시켰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바이러스의 강인한 생명력과 약간 잠복기가 있는 전염성이 가장 큰 원인이다.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좀비에게 당했다는 것을 숨기면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대상이 가족과 친구라면 쉽게 유일한 약점인 머리를 날려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 이미지 몇 개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로 채워졌다. 밀라 요보비치 같은 슈퍼액션 영웅은 없지만 격리된 공간 속에서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것과 이들 속에 한 명만 언데드로 변해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등이 언데드의 공격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여기에 생존을 위해 힘을 합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우선시하는 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작가는 이런 사실을 깊게 파고들기보다 간단한 현상만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느 순간 동지가 적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시점이 다양해짐에 따라 주인공 변호사의 모험이 한 축을 이루고, 다른 한 축은 루시아를 따라간다. 루시아를 통해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면서 생존하려는 인류의 현주소와 한 인간의 절박한 생존 욕구가 허술하게 숨겨지고 통제된 공간과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왜 변호사 등이 위험한 대륙으로 갈 수밖에 없는지 알려줄 때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기반에서 발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석유가 없고, 의약품 등이 없으면 단숨에 중세로 퇴행한다. 제대로 된 산업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과 자본을 구하기는 더 힘들다. 가장 필요한 의료진마저 부족한 것은 그들이 이 전염병이 생겼을 때 가장 일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와 무기의 부족 또한 이와 유사하다. 두 번째 생존기는 역시 액션과 다음 편을 위한 설정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처절함이나 공포가 약하다. 의약품을 구하기 위해 간 변호사 등의 조직이 보여준 몇 가지 즉각적 행동은 너무나도 빠르게 이루어져 인간적 감정을 느낄 새도 없다. 그리고 힘들게 함께 살아남은 루시아와 프리 첸코 등이 보여주는 강한 유대와 결속은 전우애를 공유한 가족처럼 다가온다. 삼부작으로 완결이 되었다고 하니 마지막 편에서 과연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인류가 생존에 성공할지, 아니면 반전이 펼쳐질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마지막 장면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다음 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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