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양보
특이한 형식의 소설이다. 처음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두 남자의 존재감이 사라진 곳을 다른 사람들이 채운다. 그런데 이들도 주인공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주인공들 중 한 명이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 같은 인물을 소설 속에 집어넣고 그 유명했던 벤처 버블 시대의 풍경을 만화경처럼 보여준다. 이제는 기억에 희미해진 그 당시를 사실과 거짓으로 잘 엮어서 펼쳐 보여준다. 그 이야기는 과거를 통해 현실로 이어지고, 이 현실은 이제 다시 과거가 되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간단한 약력이 나오면서 이들이 걸어온 길을 현실과 연결시키고, 단군 이래 최고의 거품이 어떤 식으로 풀려나갔는지 보여준다. 소설 속에 중요한 몇 명은 현실에서도 아주 이름난 사람이다.
미래 피아의 회장 김도술은 미래산업의 정문술 회장이고, 그가 투자한 회사 중 한 곳은 그 유명한 안철수연구소다. 가명 혹은 간접적인 이름으로 이들을 가렸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이다. 이 중에서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은 김도술이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파격적이다. 그 당시 벤처 사업가들이 개미투자자나 정부 보조금을 이용해 어떻게 흥청망청 사용하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보여준다. 그 당시 김도술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은 엄청난 욕을 하겠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그 돈은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돈이다. 그렇다고 김도술을 적극적으로 변명할 마음은 없다. 전직 문학가와 전직 기자 출신 광고인과 전직 및 현직 안기부 요원들이 엮어 만들어내는 하룻밤의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핵심이다. 고급술과 여자들에게 돈을 쏟아붓는 그들의 행동은 건실한 벤처인들을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갑자기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와 돈을 그들은 주체하지 못한다. 김도술은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말한다.
이때의 경험이 그들의 10년을 혹은 평생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다. 겨우 2년 정도다. 이때 충실하게 준비한 회사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고, 남의 돈 쓰는 재미에 단순히 빠졌던 사람들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인 어둠의 양보는 소설 속에 몇 번 나온다. 가장 길게 나오는 것은 역시 김도술의 말 속이다. 그는 “빛은 어둠의 양보 덕분에 탄생한 거야.”라고 말한다. 빛을 계속 보면 눈이 멀기 때문에 완전한 어둠 속에 들어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긍정과 버림을 말하는데 실제 정문술이 보여준 기부는 이것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을 좇을 뿐이다. 김도술이 벤처기업들을 한 건물에 모아놓고 흥청망청 돈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가 미래 피아 사장으로 돈 잘 쓰는 권준 도를 앉힌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아주 많이 재현했는데 어느 선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신정아도 있고, 국정원 출신도 있다. 그 유명한 풀살롱 탄생 비화가 사실인지도. 술에 찌든 천재 문학가나 섹스 중독에 빠진 광고인의 이야기도 어느 정도 사실인지. 노골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나타내는 말을 책 마지막 부분에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다. 작가가 벤처기업에 일할 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당사자만 알 것이다. 솔직히 이런 부분이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특이한 만화경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약간은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갈라질 것이다.
레드 라이징(레드 라이징 3부작)
모두 읽은 후 머릿속을 떠다닌 생각은 언제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서 검색을 하니 이 책 이외에 다른 책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존 닷컴을 검색한다. 레드 라이징 트롤리지로 세 권이 보인다. 2권은 올해 출간되었고, 3권은 내년 2월에 나올 예정이다. 빠르면 한국에서도 이 시리즈를 내년 이후면 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니 말이다. 지금까지 영화로 나와 흥행을 한 원작은 다 나왔던 전례를 생각하면 나름대로의 확신이 생긴다. 이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이냐고? 바로 이 소설에 있다. 레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화성에서 가장 낮은 계급의 색깔이다. 아니 레드는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다.
처음 색으로 계급을 표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떠올랐다. SF 소설로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가 생각났다. 이 소설이 인도의 신 이름을 가진 존재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었다면 <레드 라이징>은 로마 시대의 이름과 신화 등을 배경으로 한다. 처음에는 골드 계급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계급 또한 적지 않은 숫자를 가지고 있다. 태양계에 1억 명 이상이 존재한다. 당연히 이 인구라면 그 속에서도 등급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화성의 땅 속에서 광부처럼 살고 있는 일반 레드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주인공 대로우는 열여섯 살이고, 색은 레드다. 그는 화성 땅속에서 헬륨-3라는 광물을 캐는 헬 다이버다. 그의 손재주는 탁월하다. 이번 주 채취는 실적이 좋다. 1등을 하면 같은 조직에 많은 음식물이 전달된다.
모든 광부 조직은 이것을 위해 노력한다. 먹을 것과 의약품을 생각하면서 아주 큰 위험도 감수한다. 대로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의 1등은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과 다름없다. 대로우는 결혼했다. 아내의 이름은 이오다. 아내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혁명이 꿈틀거린다. 대로우에게는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이오가 부른 금지곡으로 인해 죽게 된다. 이 세상의 교수형은 잔혹하다. 가벼운 중력 때문에 누군가가 올가미를 맨 사람의 다리를 잡고 무게를 늘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오는 대로우가 매달린다. 운명적 사랑이었던 이오의 죽음은 그를 파멸로 이끈다. 그도 교수형에 처해진다. 만약 죽었다면 이야기는 끌이다. 죽음 속에서 그는 살아난다. 그를 살린 것은 아레스의 아이들이란 조직이다. 이 조직은 골드 조직 속에 레드를 숨겨놓고 그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로우를 골드 속에 넣기 위해 그를 조각하고, 교육한다. 수술로 외모를 바꿀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과 말투도 같이 바꾼다. 잠깐 실수하면 죽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대로우가 위장 신분과 외모로 골드의 학교에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 시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곳으로 가는 인물을 찾아내고, 인류의 발전이 어떤 단계를 거쳤는지 보여준다.
<파리 대왕>의 인용이 많은 것은 바로 이 과정 속에서 보여준 인간의 원초적인 힘과 폭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아주 먼 미래다. 지구가 아닌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서도 인류는 생존한다. 최상층 계급인 골드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놀고먹는 유한계급 같지만 실제 그들이 경험했던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그보다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이 없다. 어떻게 그들이 가장 높은 위치의 계급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험은 한 차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첫 관문이 통로에서 만난 동기를 죽이는 것이다. 살인의 경험도 생긴다. 1000명이 단숨에 반으로 줄어든다. 이 인원들도 화성의 표면에서 경쟁해야 한다. 승자 한 명만이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다른 소설처럼 생존자 한 명만을 위한 게임이 아니다. 이 지점이 <헝거게임>과 다른 부분이다. <헝거게임>이 킹 선생의 <롱 워크>를 확대 재생산했다는 평을 감안하면 이 작품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고, 최고의 계급인 골드로 조각한 아레스의 아이들이 바란 것 이상으로 대로우는 성장한다. 이 성장과정에서 그는 골드를 알고, 형제를 만들고, 생각하고 싸우는 방법 등을 배운다. 그가 바란 것은 화성의 대총 독 아우구스투스를 죽이는 것인데 이제 그의 세계가 넓어진다. 다른 세계로 오면서 그가 방송을 통해 배운 지식과 정보들이 얼마나 왜곡되었고, 지배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제 그 꿈은 단순히 한 명의 골드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골드와 생활하고 함께 투쟁하면서 그는 더 거대한 꿈을 꾼다. 새롭게 사귄 골드와의 관계는 잠깐 동안 그를 고뇌에 빠트리지만 원대한 꿈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거대한 설계를 가진 소설이다 보니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이 부분이 다음 이야기를 더 기다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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