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크리처스 - 그린브라이어의 연인
“트라일라잇”에 완전히 반해 판타지 로맨스라면 책뿐만 아니라 드라마며 영화며 죄 찾아보고 있는 내 여동생 - 명절에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자 빨리 읽고 자기에게 달라고 여간 성화가 아니었다 -처럼 홀딱 반할 만한 그런 작품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판타지 로맨스” 소설에 대한 나의 거부감을 깨뜨리기에는 충분한 재미를 보여준 소설이라고 평하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니 다음 권들도 기대해볼 만하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거부감이 옅어진 다른 “판타지 로맨스” 소설들도 눈여겨볼 생각이다. 그래서 과연 여성들만 좋아할 만한 그런 장르였는지, 문화적 아이콘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콘텐츠로서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평가해보고 싶다. 그래도 이왕이면 “로맨스”가 주(主)이고 “판타지”는 그저 장르적 형식만을 빌어 쓴 작품들보다는 정교한 “판타지”적 세계관과 사건들을 바탕으로 거기에 멋진 “로맨스”가 곁들여진 작품 - 장르가 전혀 다르지만 무협소설 마니아들에게는 “신(神)”으로 추앙받는 대만 작가 “김용(金庸)”의 <신조협려(神雕俠侶)>가 바로 “무협 로맨스”소설로서 남성들에게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았었고 나 또한 두 주인공인 양과 와 소용녀의 애달픈 사랑에 꽤나 마음 아팠던 것을 보면 이런 로맨스 소설이 영 아니지는 않은 것 같다 - 들이 내 취향에는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보면 판타지 “로맨스” 소설에 대한 거부감이 비록 그 정도는 옅어졌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뱀파이어들의 이야기가, 영원히 그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만 싶을 틴에이저들을 겨냥한 판타지물의 주제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철없는 젊은이들은 저희들의 청춘이 마냥 영원할 것이라고만 착각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본능적 영악함은 그 터질 듯한 꽃봉오리의 선도가 어느 한 순간 낙화의 처연함을 맛볼 것이라는 점도 잘 안다. 잔인하고 철두철미한 시장의 계산은 이들의 환상과 집착을 정조준함이 당연했고, 여기에 <나이의 초월과 망각>을 새 화두로 내세운 시대의 한 트렌드, <어모털리티>의 의식 조작적 선동도 한몫 한 바 있다.
“여기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사람(못 떠난 사람)과 멍청해서 떠나지 못한 사람(멍청이)” 밖에 없다는 미국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작은 마을 “개 틀린”에 살고 있는 “나”(이선 로슨 웨이트)는 어서 대학생이 되어서 이 깜짝 놀랄 일이라곤 전혀 없는 이 마을을 빨리 떠나고 싶은 꿈을 꾸고 있는 16세 소년이다. 몇 달 전부터 밤마다 반복되는 꿈, 즉 여자애가 떨어지고, 나도 떨어지고, 내가 여자애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실패하는 꿈을 꾸는 나에게 “열여섯 개의 달, 열여섯 해 ~”로 시작되는 우울하고 오싹한 노래가 아이팟에 담겨있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초등학교 3학년 이후 한 번도 우리 반에 전학 온 적이 없던 “스톤월 잭슨 고등학교” 학기 첫날에 낯선 여자애가 전학이 오는데, 바로 이 마을 은둔자이자 얼굴 한번 내 비친 적이 없다는 “메이컨 멜기세덱 레 비븐 우드”의 조카인 “리나 두케인”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녀에게서 꿈속에서 만난 여자애의 냄새인 레몬과 로즈메리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바로 꿈속의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리나에게 운명처럼 이끌리던 나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그녀를 보호하게 되고, 덩달아 나 또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지만 괘념치 않고 그녀에게 더욱 이끌리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녀가 마치 텔레파시처럼 내 머릿속에 말을 걸어오고, 그녀의 집안이 환영 술을 펼치고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주문으로 물체를 이동시키고 만들어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술사” 집안이며, 그녀가 이번 16세 생일에 빛과 어둠을 선택해야 한다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지켜내겠다고 굳게 약속한다. 마침내 남북전쟁 재현극으로 온 동네가 어수선한 그날에 그녀의 16세 생일을 맞이하고 그녀의 생모(生母)이자 어둠의 주술사인 새라핀이 들이닥치면서 빛과 어둠의 일대 대격전이 벌어진다. 과연 “나”는 그녀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 그녀의 최종 선택은 과연 “빛”과 “어둠” 중 어느 것이었을까? 마지막 결론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한다^^
미국에서는 출간 한 달 만에 영 어덜트(YA) 소설 부문의 독보적인 올해의 소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는 이 소설은 두 권은 족히 될 만한 분량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장르였음에도 막상 읽어 보니 불과 이틀 - 설 명절 연휴동안 본가인 대전으로 이동하면서 읽기 시작해서 본가에서 쉬면서 짬짬이 읽었음에도 이틀 후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마지막 장을 넘겼다 - 만에 술술 다 읽게 된 책이었다. 200여 년 남짓밖에 안 되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남북전쟁”의 상흔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보수적인 마을 “개 틀린”을 배경으로 남북 전쟁 당시의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이 현대에 이르러 16세 두 남녀에게 마치 “대물림”처럼 재현되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특히 그동안 별다른 신화와 전설을 가지고 있지 않아 유럽 고유 신화인 “뱀파이어”, “타락 천사” 등의 설화를 빌어온 소재의 한계성을 벗어나 “주술사(呪術士)” - 원어로는 마법사나 마술사라는 뜻이었을 것 같은데 “주술사”라는 번역이 다소 낯설다. 원래 원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라는 독특한 설정이 제법 흥미롭게 느껴졌다, 운명의 날인 리나의 생일을 향해 하루하루 지나면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은 임팩트가 약한 - 스티븐 킹의 “캐리”를 연상시키는 무도회 장면에서는 뭔가 강렬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를 했지만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끝나버린다. 물론 대상이 영 어덜트, 즉 청소년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 평이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영 궁금해서 책을 손에서 쉽게 놓지 못하게 한다. 결말도 총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즉 이 책이 완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분명하게 매듭을 짓지 않고 끝나게 되는데, 두 남녀 주인공이 17세가 되는 시점인 다음 권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종의 열린 결말로 마무리한 점도 나름 괜찮게 느껴진다. 다만 애절한 두 남녀의 사랑에 별 감흥을 못 느꼈다는 점인데 내 가슴이 메말랐음을 탓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예 전, 수학자 겸 철학자인 레이먼드 스멀리언은 그의 저서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인가>에서, 책 말미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퍼즐 형식으로 간단하게 소개하며, "그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세계가 멸망하는 그런 여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명제의 진위를 논리학적으로 검증한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게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뤽 베송은 역시, 그녀(과연 성별상 '그녀'의 카테고리였을까?)가 그 미션에 실패할 경우, 지구는 물론 전 우주가 파국의 운명을 맞을 수 있는, 궁극의 에너지원 '제5 원소'를 체화한 어느 소녀의 어드벤처를 영상으로 옮긴 바 있다. 삼라만상은 정해진 섭리에 의해 탄생하고(만약 그 시작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운행을 그 고유의 항상성 원리에 의해 지속하며, 주어진 엔트로피의 탄성이 교란 한계점을 맞이하면 소멸하게 된다. 하나, 그 코스모스에 갇힌 피조물(크리처)들은, 이 분명하고도 불가역 한 페이트에 맞서 절망적이고도 영웅적인 저항을 지속하는데, 그것 또한 소립자들의 입자 가속기 속 격렬한 운동이나 마찬가지로 물리계의 법칙 준수 양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분명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그러나 그 파국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그 결말을 회피하려 든다. 여기에 개입하여 운명의 분수령을 변환하려 드는 건 아직은 약하고 미성숙하게만 보이는 제5 원소의 잔다르크적 출정(出征)이다.
여기에 기묘함(queerness)를 더하는 건 두 공동저자의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커리어다. 한 저자인 캐미 가르시아는, 작중 애마 트루도를 대변하듯 아직도 남부 고유의 자부심과 설욕 의식이 에고 한 구석을 떠나지 않은 정통 남부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생업의 대종을 10대 청소년을 상대하고 교육하는 일로 이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기막힌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한 이 <남부>와 <틴에이저> 키워드 둘의 조합은, 끝없이 이어져 식상하다 싶은 에버그린 흡혈귀 스토리에 새로운 활력과 호기심 요소를 충전한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의 공저자인 마가렛 스톨은, 역시 영화와 소설 분야 모두에서 그 뱀파이어 피처의 열기와 활력이 식지 않고 있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하이브리드 성의 교육 배경을 지닌 신인 작가다. 그녀의 교육 자산 역시 정통 영문학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 발은 첨단의 성장 산업인 비디오 게임 제작에 들여놓은, 고전과 모던의 혼성 크리에이티브를 요하는 이력을 완성해 나가는 중이다.
4 월 18일 제법 그 면면이 흥미로운 진용까지 갖춰 화려한 스크린으로까지 옮겨져 우리에게 전면적으로 다시 선뵈는 이 이색적인 판타지물은, 이러한 오랜 문학적-신화적-종교적 전통의 외피와 얼개 위에다, 미국 고유의 흑역사적 상처까지 접합하여 기묘한 템포와 색채로 전개해 나가는 <뜻하지 않은 여정의 시작>이다. 리나(Lena)와 이선(Ethan)은 과연 이 은하계적 변곡점의 중력 교차의 난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타개, 탈출, 최종적 조율 작업을 행할 것인지? 한 개인의 성숙과 통과의례가 전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기막힌 미시와 거시의 상호 얽힘은 알고 보면 소설 속에서의 허구만은 아니다. <체인지 메이커>라고 했던가. 결국 보잘것없어 보이는 개인의 실천과 인연이 씨줄, 날줄로 얽혀, 거대한 흐름의 근본 흐름을 바꾸는 건 우리 인류가 익히 접해 왔던 우주의 섭리에 가깝다. 청소년 판타지에서 오랜 진리와 교조를 확인하는 뜻밖의 소득은 깨어 있는 독자에게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며, 하물며 수업시대를 견실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수놓고 담금질한 능력 있는 저자들의 손을 통해서라면 당연 기대함직한 멋진 체험이다. 소설과 영화는 알고 보면 상호 대체 관계가 아닌, 입체적 인식의 개안을 돕는 다용도 키트를 구성하는 쌍둥이 형제이니, 이 변덕스러우나 설레는 기후의 4월에 우리를 저 흥겨운 놀이동산으로 신나게 띄워줄 청룡열차라 안심하고 의지해도 좋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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