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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by 쓸쓰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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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비밀> 등 일본 현지와 국내에서 숱한 인기 영화를 탄생하게 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다수의 인기작을 낳은 장본인답게 그의 작품은 출간됨과 동시에 꾸준히 사랑받으며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오곤 했다. 사실 그만큼 오랜 세월 다작을 해온 작가이기도 한데, 그 와중에 나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추리소설, <탐정클럽> 하나를 읽어보았을 뿐이다. 그러던 2014년의 초입, 새로운 인연을 맺는 기분으로 그의 신간 소설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됐다. '질풍론도'라니 약간 공허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목표를 향해 달려갈 것만 같은 긴박감이 느껴졌다.

 

술술 읽힐 것 같아 미루지 않고 바로 일독을 시작했다. 설원을 연상케 하는 표지에서부터 느껴지는 겨울이 어떻게 그려질까. 스스로도 재미있어 놀랐다는 이야기는 약간 신빙성이 없지만, 그래도 명성과 자신감의 근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표지의 예상은 적중, 이야기의 중심은 겨울의 일본, 새하얀 스키장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바로 전 작품도 스키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데, 요즈음 스키에 특별한 애착을 갖는 걸까. 전작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유전자와 관련된 과학적 단서를 심어놓고 있는 듯했다.

 

<질풍론도>는 이와 닮았다. 비록 출생의 비밀 이야기는 아니지만, 스키장을 배경으로 과학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질풍론도>에서 과학적 소재라 함은, 이야기 흐름에 핵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 호흡기로 전염되며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탄저균이 바로 그것. 스키장에 숨겨 놓은 이 병원균을 비밀리에 다시 실험실로 옮겨놓고자, 아들과 함께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구리바야시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본격 과학소설이라 할 만큼 탄탄하고 디테일한 수준은 아니어서, 이렇다 할 깊이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한 분위기를 소설 전반에 얇게 펴 바르는 역할을 하는 핵심을 탄저균의 공포가 맡고 있는 것이다. 꽤나 살벌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주된 그림은 스키장에서 생업을 잇고 있는 주민들과 그 미래를 꿈꾸게 하는 실력 좋은 지역의 꼬마 스키어들, 그밖에 스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탄저균을 찾아야만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구리바야시 또한 아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회복해 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따뜻함이 배어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차갑고 서늘할 수 있는 배경과 소재를 안고 있지만 그 안에 스민 인간의 감정들은 굉장히 따뜻하다. 이야기에 위기를 가져다주는 인물들이 몇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보다 정이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강한 힘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일까, '큰 일이다!' 하는 느낌은 실제로 묘사되고 있는 이야기 속 사실에 비해 소소한 것으로 느껴지는 감은 있었다. 그의 소설이 영화화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쉽게 이해가 갔다. 그의 소설은 문장 하나하나가 이어져갈 때마다 영화의 장면들이 이어 붙여지는 인상을 준다.

 

그림이 쉽게 그려지는 묘사가 그의 글이 주는 재미인 것 같다. 긴박하게 달렸기 때문일까, 후반부에서 지나치게 서둘러 마무리되는 것 같기는 했다. 다만 그 흐름의 연장이 부드럽다는 점은 다작을 이끌어 낸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추위에 눈이 가득한 스키장의 이야기를 읽는 것, 소름이 오소소 돋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구리바야시는 'K-55' 용기가 깨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봄바람을 탄 초미립자는 거침없이 산기슭까지 내려올 것이다. 여름을 맞이할 때까지 사토자와 온천 마을에서 사고가 날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흡입탄저 증세는 인플루엔자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 치료는 나중 문제일 것이다. 설령 탄저라고 판명이 나도 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은 전혀 듣지 않는다. 명색이 유전자 조작을 한 생물병기다. (146쪽) 마나미는 '능력 있는 독수리는 발톱을 숨긴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지금 직장에 들어간 뒤로도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봤자, 그걸 반드시 평가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심부름센터 사람처럼 이용당하다, 닳고 해져서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기에 십상이라고 곧잘 말했다. (217~218쪽) 구리바야시는 얼굴 옆에서 손을 저었다. "세상에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야.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다." (362쪽) 의과대학 연구소 연구원인 가쓰야가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K-55 탄저균을 만들기 시작하고 연구소 소장인 도고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술개발을 위해 방관하다가 결국 완성되자 해고하게 됩니다.

 

복수심이 가쓰야는 설산에 탄저균을 묻고 도고에게 협박 이메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그 후에는 여러 인물들이 각각의 이유로 탄저균 K-55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구리야바시 가즈유키 와 도고 마사오미> 도고는 협박 이메일을 받고 마을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음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직접 처리하자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구리야바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신의 명성, 사회적 지휘, 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인의 이기심과 현실과의 타협을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네즈 쇼헤이 와 세리 치아키> 구리야바시의 한 아이의 생명이 달렸다는 즉흥적인 거짓말에 속아 네즈가 두말 않고 k-55을 찾기 위해 도와주게 되고 치아키는 네즈와 함께 K-55를 찾으면서 우연히 스키를 타며 범인을 추격하게 되고 자신의 재능이 쓸모없는 게 아니라 세상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슬럼프를 극복합니다. 자신의 작고 하찮은 재능으로도 세상을 구할 수 있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옳은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추진하는 행동력을 보여주는 인물들인 네즈와 치아키의 활주극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됩니다.

 

스릴 넘치고 우습기까지 합니다. <오리구치 미나미와 오리구치 에이치> 미나미는 재능이 있음에도 회사에선 적당히 일만 하는 순진한 연구원으로 가장하고 성공의 기회를 잡기 위해 각 연구소에 도청기까지 설치해 상대방들의 약점을 잡아내려 합니다. 이 와중에 도고와 구리야바시의 대화를 듣게 되고 K-55를 빼앗아 큰돈을 벌기 위해 동생인 오리구치에게 보물 찾기라 거짓말을 하고 도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오리구치는 빛 청산을 위해 합류하게 합니다. 자신의 노력만큼 보상을 해주지 못하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고 여겨 생기는 한탕주의를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유키의 가족들의 갈등이 탄저균 K-55로 인해 고조되고 거기서 유키어머님의 『행복론』 이 나오게 됩니다.

 

역시 글쓰시는 분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 같네요. 궁금하신 분들은 책사서 보시길. “등장인물에게 절대로 지지 마라 “라는 작가의 말은 불행한 현실 때문에 개인의 이기심에 물들고 악과 타협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재능을 믿으며 포기 않고 끝까지 노력하고 실천하는 개인들이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 같습니다. 질풍론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시작과 전반부, 후반부로 나누고, 일단 시작부터 보자. [일명 k-55라는 탄저균이 든 물건이 규모가 꽤 큰 스키장 어딘가에 묻혀 있다. 탄저균을 묻은 장소는 당연히 범인 밖에 모른다. 범인은 자신이 근무한 연구소 소장(도고)에게 이메일을 보내 돈 3억 엔을 요구한다.

 

돈을 주지 않으면 당연히 폭발하고, 주면 묻힌 장소를 가르쳐주겠다. 이메일에는 묻힌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두 장이 첨부되어 있다. 한 장은 구체적인 장소를 나타내는 테디 베어가 걸린 근거리 나무 사진, 다른 한 장은 멀리서 철탑이 보이는 원거리 사진. 놀랄 사이도 없이 소장에게 바로 전화가 온다. 연구소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경찰의 전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 소장과 도난사실을 이메일이 아닌 직접 눈으로 확인한 연구원 구리바야시.]

 

이 소설의 시작이고, 이제 좀 더 자세하지만 중복되는 전반부 줄거리. [전직 연구원(범인)이 자신이 근무했던 의과대학 연구소에 앙심(왜)을 품고 다수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끔찍한 생화학 병기 탄저균(무엇을)을 묻었으나 바로 죽어버렸다. 죽은 장소를 추정하니 백 군데가 넘는 스키장 중 어느 한 곳(어디서). 탄저균 보관용기의 발신기 배터리는 일주일 용량이니(언제), 방향탐지 수신기를 이용해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있고(어떻게) 이에 연구원 구리바야시가 찾아 나선다.] 다 알았는데 한 가지가 광범위하다. 백 군데가 넘는 스키장중 한 곳. 그러니 이 소설의 주요 설정과 큰 맥락은 ‘어디서’를 찾는 게 되겠고, 여기에 ‘일주일’이란 기한이 정해져 있다.

 

광범위한 공간과 제한적 시간에 제약을 거는 건 아주 흔한 공식. 근데 더 중요한 점은 그걸 찾는 사람이다. 바로 중학생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이자 연구원 ‘구리바야시’라는 것. 경찰에 알리자니 불법으로 탄저균을 보관한 게 드러나고, 다른 사람들을 동원하자니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래서 찾는 사람으로 자의반 타의 반 그 혼자 나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소장 도고란 캐릭터는 융통성 없고, 나서지 않고 시키기만 할 줄 아는 권위적이며 멍청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러니 평범한 구리바야시에게는 도움을 구할 조력자 한 명 없다. 정말 그 혼자서 찾아야 한다. 시작 부분이나 전반부 줄거리나 비슷한 건 딱히 비중은 있어도 그의 활약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노보드에 빠진 중학생 아들의 도움으로 사토자와 온천스키장까지 공간을 좁혔고, 그걸 찾기 위해 스키장을 잘 아는 아들을 데리고 가서 혼자 탄저균을 찾아 헤매는 내용이 전반부의 주요내용 전부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후반부 줄거리는? 평범하고 스키도 잘 못 타는 연구원이자 가장인 구리바야시가 탄저균을 제대로 못 찾는 와중에 스키장 패트롤 ‘네즈’의 본격적인 도움을 받게 되어 결국 찾는다는 내용이다. 자, 시작을 좀 자세히, 전후반부의 내용을 간단히 기술한 이유는 이렇다. 이것이 작가가 설정한 뼈대이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제시한 육하원칙의 단서와 두 가지 제약이 걸린 일을 수행해야 하는 평범한 가장이자 연구원 구리바야시. 그리고 본격적인 해결을 하기 위해 나서는 스키장 패트롤 네즈. 이 삼각설정이 뼈대란 말이다. 필자는, 작품을 비난할 때(호평이야 상관없지만) 그 주요 설정(뼈대)만큼은 건드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주요 설정은 작가 고유의 권한이기에, 독자는 주요 설정에 붙어있는 외형적인 살만을 보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다리뼈를 세우고 척추를 연결한 후 두개골을 얹어 인간이란 뼈대(주요 설정)를 만들었다. 만약 다리뼈가 견갑골 옆에 붙어있다면 그건 잘못된 설정이겠으나 멀쩡하게 사람모양으로 주요 설정을 잘 만들어 놨다고 친다면, 그걸 비난할 수 있을까? 소설내용을 예로 들어, 왜 수영장이 아니고 스키장이냐, 왜 하루가 아니고 일주일씩이냐, 왜 첩보원이 아니고 평범한 가장이고, 활약하는 스키장 패트롤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냐고 비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저 작가가 이런 설정을 한 것이다.

 

그 뼈대 위에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미녀와 추녀가 만들어진다. 싫고 좋음은 그때부터 논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평범한 가장 구리바야시는 스키를 잘 못 탄다. 그래서 함께 찾지는 않더라도 데려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려고 아들을 데리고 갔다. 아들은 중학생이다. 모든 남자 중학생이 중2병에 걸리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이 정도의 차는 있어도 약간의 무뚝뚝함과 반항심은 있다. 거기서 써먹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부자간의 갈등이다. 게다가 도움도 받았고 여행 아닌 여행지에서 두 사람만 함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중학생이니 오죽 여학생이 눈에 들어올까. 작은 에피소드가 추가될 수 있다. 스키를 잘 못 타고, 금지구역 안으로 들어가니 어딘가 다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리고 주요설정한 스키장 패트롤 ‘네즈’가 본격적인 활약도 해야 한다. 여기서 조력자 아들 대신 예를 들어 특전사 출신의 처남이 마침 집에 놀러 와서 구리바야시와 함께 스키장에 간다면? 스키도 잘 못 타는 평범한 가장은 뒤로 밀려나고 당연히 특전사 출신의 처남이 활약을 하게 된다. 주요 설정에 어긋난다. 그렇게 되면 후반부 네즈의 활약도 묻히게 될 가능성이 있다. ‘평범한 가장’이 주요 설정이니 평범한 가장답게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중학생 아들 정도가 함께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스키도 잘 못 타고, 따로 이런 대처훈련을 받지 않았으니 어리바리한 행동도 자연스럽다. 후반부, 네즈의 활약도 대비가 되기에 더 큰 캐릭터 효과를 줄 수 있다. 이 소설은 전작 ‘백은의 잭’에서 등장했던 ‘네즈’가 나오며 주인공은 네즈라고 볼 수 있지만, ‘백은의 잭’에서도 더블 캐스팅(‘쿠라타’와 ‘네즈’이나 비중은 ‘쿠라타’가 돔 더 컸음)이었으며 이 소설에서도 다시 등장했으니 이제는 ‘스키장 패트롤 네즈 시리즈’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백은의 잭’에서는 더블 캐스팅이 함께 움직였지만 이번은 후반부에서 합쳐지는 구성일 뿐이다. 넓은 스키장에서 불법 백신을 찾는다고 다리를 다친 구리바야시는 거짓말을 한다. 지금까지의 전개와 성격을 보면 자연스럽다.

 

착하고 정의감 있는 네즈에게 ‘백은의 잭’에서도 귀엽게 등장했던 스노보드 선수 세리 치아키를 다시 등장시켜 그의 조력자로 투입한다. 스키장이란 공간을 잘 이해하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면서 사건은 급속 전개, 결국 탄저균을 회수하는데 성공한다. 네즈가 뛰어난 청년이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혼자는 힘들다. 조력자가 필요한데, 왜 조력자로 세리 치아키를 등장시켰을까? 누가 나오던 그건 작가의 세부설정이겠으나 작가는 ‘가가 형사 시리즈’나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처럼 ‘스키장 패트롤 네즈 시리즈’를 이어나갈 듯하다(개인적 바람이다.) 그렇다면 전작 등장인물 한두 명쯤 데려오는 게 자연스럽고 재밌다. 이미 캐릭터 설정을 해두었으니 굳이 설명도 필요 없고, 동성보단 이성이 에피소드 만드는데 좋을 듯하다. 전작에서 치아키의 네즈에 대한 호감 있는 뉘앙스도 풍겼고 스노보드 선수이니 여러 스키장 옮겨 다니는 것도, 맹활약하는데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치아키의 등장이 자연스럽고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이다.

 

주인공이 활약을 하려면 악역(상대역)이 굉장히 중요하다. 악역의 캐릭터와 능력여부에 따라 주인공이 돋보이거나 이야기가 더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평범가장 구리바야시에게 악역(오리구치)은 많이 버거운 상대였다. 일단 스키 실력부터 사람을 능글맞게 대하는 방식과 거친 면에 있어서 그렇다. 밀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네즈는 다르다. 스키 실력과 악역에는 없는 정의감이 있다. 더블캐스팅이 대비되는 효과를 주고 있다. 만약 악역이 좀 더 강했다면? 구리바야시가 너무 허약해 더블캐스팅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다.

 

단번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리바야시보다는 조금 더 강하면서 네즈가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악역. 이게 자연스럽다. 만약 네즈보다 더 강한 악역이 등장한다면? 소설의 스타일도 많이 달라질 듯하다.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다는 건 주요 설정에 영향을 준다. 애초 뼈대 중 하나인 더블캐스팅의 구리바야시는 평범 가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강하면 스케일은 정말 커지고 이 소설의 판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즉, 구리바야시는 등장할 이유가 없으며 강한 악역은 강한 무기와 능력을 쓸 수밖에 없기에 이 소설은 자칫 첩보소설류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게 된다면, 시작부터 탄저균을 훔친 범인은 평범한 전직 연구원이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훔치거나 손에 넣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작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시작부터 평범한 연구원이 훔치고 어이없이 죽는다. 평범가장이 찾으러 가고 그저 정의감 있는 스키장 패트롤 네즈가 주위사람들과 합심해 사건을 해결하는 정도다. 그러니 악역의 수준도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본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굳이 탄저균이라는 생화학물질로 설정했어야 했을까? 너무 무시무시한 물질인데 활극 수준이 그에 못 미치니 말이다. 이건 세부설정의 호불호가 갈리는 얘긴데, 전작 ‘백은의 잭’에서도 폭탄을 숨겨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가상의 인질로 잡아놓았다.

 

그러니까 꼭 수많은 사람들을 가상의 인질로 잡아놓을 필요는 없지만, 스키장이란 공간으로 주요설정을 해놓았다. 거기에 탄저균이란 세부설정이 들어간 거다. 굳이 탄저균이 아니라도 공간적 배경을 크게 잡았으니 전체를 잡아먹을 수 있는 큰 무엇이 걸맞고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 공간배경만 큰 상태에서 수류탄 하나 찾으러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후반부, 인플루엔자에 걸려 죽은 아이의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연결되는데, 이것도 세부설정의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백은의 잭’에서는 범인이 스키장에 폭탄을 설치한 이유로 황당하게도 환경파괴를 들먹인다.

 

그런데 이 환경파괴가 결국은 스키장 간부진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코스와 연관이 있으면서 결국엔 전체 이야기와 맞물리고 있다. ‘질풍론도’ 또한 마찬가지다. 탄저균을 설정했으니 써먹기는 해야겠다. 그렇다고 보관용기가 깨진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죽게 되니 소설은 걷잡을 수없이 커지고 설정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탄저균이 아니라 충분히 치료가능하고 죽을 수도 있는 약한 인플루엔자를 세부설정한 것이다. 그래야 소설에 등장한 탄저균이 덜 뜬금없고 소재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매우 잘 맞물린 에피소드로 보았다. 전체적으로 재밌게 보았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 위에서 악역에 대해 언급했는데, 만약 악역으로 오리구치가 아닌 그의 누나, 마나미(구리바야시와 같은 연구소 직원. 오리구치를 조종한 인물)가 전면등장 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여성이기에 신체능력은 떨어질 수 있고 세부설정은 약한 느낌으로 해놨지만 상당히 영악한 면이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오리구치가 악역으로 적당한 느낌도 있지만, 마나미도 함께 나왔다면 더 흥미진진한 전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족 : 마지막 마나미가 공항에서 잡히고 해동이 시작된 프랑크 소시지 에피소드를 좀 더 묘사했다면 재밌었을 텐데 말이다."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이 적힌 책을 보면, 갈등이 됩니다. 이것을 읽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그냥 넘어가자니, 그동안 작가가 약속했던 재미가 아쉽고, 읽자니, 또 뻔한 얘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책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뭐 일단, 안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은 느낌은, "와, 역시 노장은 죽지 않는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용 자체는 별것 없습니다. 백신 연구소에서 몰래 생물학 무기를 만든 연구원이 자신이 만든 무기를 빼 내서, 연구소를 상대로 협박하려고 하다가, 세균만 스키장 깊숙이 숨겨두고,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연구소장의 명령을 받고 주인공은 아들과 함께, 스키장을 찾아갑니다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갑자기 스키를 잘 탈리가 없지요.

 

그래서, 거짓말로 스키장 안전 요원을 꼬드겨서 세균무기를 찾으려 하고, 그 무기를 다시 훔쳐내려는 연구소의 기회주의자는 호시탐탐 무기를 빼앗을 기회를 노립니다. 뭐 그렇게,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커다란 음모 속의 주인공이 되어, 악당들과 스키장에서 활강을 하며 치고받고, 쫓아가고 쫓기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하드 SF를 읽는 것처럼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트집 잡을 곳이 많습니다만, "스피드"나 "007"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정신을 반쯤 놓고, 저자의 펜 끝을 따라가다 보면, "우왕~ 재밌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오락용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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