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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서평] 세 갈래 길 - 래티샤 콜롱바니 장편소설

by 쓸쓰 2020.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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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갈래 길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장편소설



세 갈래 길




개인의 잘못이 아닌 시스템의 모순과 타인들의 악의 때문에 부당한 고생을 해야 하는 여성들, 사회 하부 구조의 오물, 배설물을 피땀 흘려 코를 막아가며 치워야 하는 가장 안타까운 희생양들의 사연 세 꼭지가 이 소설 속에 담겨 있습니다. 책을 펴들 때도 안타까웠고, 책을 덮을 때도 여전히 마음이 무겁습니다(사실 잠시나마, 혹 통쾌한 반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말이죠).


현실은 여전히 다양한 방법으로 한계에 내몰린 여성들을 괴롭힙니다. 만약 전혀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이들 약자들이 함께 손을 잡을 계기가 마련되면 혹 이들에게 희망이 생길까요? 일단 이런 가정 자체가 현실화하기 아주 어려운 가능성입니다. 현실은 고사하고 소설 속에서, 특히 프랑스 여성 작가 래티샤 콜롱바니의 이 장편 속에서라면, 어째, 좀 희망이 보일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왠지 그럴 낌새도 좀 보여서 기대를 품었습니다만, 결말은 "역시나"였습니다.


소설 속에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 안에 각각 배치된(던져진) 세 여성의 삶이 소개됩니다. 나이는 서로 비슷한 또래인 듯하고 (캐나다의 사라가 좀 많은 편일까요?), 시대도 거의 같은 구간처럼 보이지만 여튼 이런 사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셋은 한 장소에서 만나기는커녕 서신 교환(혹은 요즘처럼 가상 네트워크가 발전한 세상에 어떤 매체를 통한)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지구 반대편 어느 구석에 살았었다는 사실도 모를 겁니다.


이탈리아와 인도는 멀지 않아! 거의 같은 대륙이라고 해도 되지. 음... 물론 유럽과 아시아가 통으로 붙은 땅덩어리이긴 합니다만 멀긴 꽤 멀죠. 항공편을 통해서건 혹은 어떤 다른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말입니다. 줄리아(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북미 어느 나라에서도 이처럼 흔한 여자 이름이 또 없겠네요)네는 가발 공방을 차려 제법 넉넉한 벌이와 명성을 유지하며 시칠리아(세상에, 더군다나 여긴 여튼 "대륙"은 아닙니다)에서 살아온 집안입니다만, 그 부친이 쓰러져 의식불명이 된 후에는 파산 직전인 상태입니다. 생계가 어려우니 줄리아는 원치 않는 남편감에게 "취집"이라도 당장 해야 할 판인데, 자기만의 소중한 꿈을 가꿔 온 그녀로서는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고 절망입니다. 시칠리아 전통 요리 칸놀리(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이 건너온 미국에서는 "캐놀리"라고 발음하는)를 맛보는 순간에도 "다음 덮쳐오는 파도는 나를 봐주지 않고 바로 삼켜버릴 거야." 같은 불안한 심경은 그녀를 떠나지 않습니다.


스미타의 처지는 더 안타깝습니다. 그녀는 인도 북부의 우타르프라데시에 거주하는 유부녀, 불가촉천민인 달리트 출신인데, 해가 저물 때까지 대변 치우는 일을 합니다. 배설물의 처리는 어느 농경 문화권에서도 정해진 방식이 있었고 천민 계급도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했지만 이 둘이 질기게 폐습에 의해 결부된 건 중요 문화권 중에서는 인도 말고 다른 예가 많겠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21세기인데, 농경 사회가 배설물 문제 하나를 슬기롭게 시스템상으로 처리 못 한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분들이 흔히 그렇듯 집안에서는 폭군 같은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를 받는데, 어린 딸(소설에도 나오지만 저 반대편 라자푸르에선 출산 직후 "쓸모없는 딸들"은 생매장에 가깝게 유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네요)과 함께 뭔가 탈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삶도 지금 이 지경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이 두 여성과는 전혀 극과 극의 삶을 사는 화려한 커리어 우먼이 바로 사라입니다. 미모도 출중하고 여태 살면서 좌절이란 겪어 본 적 없는 무적의 커리어를 가꿔 온 그녀입니다. 희한하게도 남자가 이런 삶을 살면 그저 공포와 존경의 대상일 뿐일텐데, 사라가 여자다 보니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데도 만인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보는 앞에서는 굽실거리며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데, 그럴 만한 자격과 가치가 충분한 성공의 연속이었죠. 다분히 통속적이기는 해도 어차피 우리네 삶 자체보다야 더 통속적이겠습니까만 사라는 덜컥 암 진단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 흔적(결실?)인 아이도 있습니다만 내내 외형상 쾌속으로 질주해 온 그녀의 앞길에 처음으로 빨간불이 켜진 겁니다.


사라가 뒤통수를 맞는 과정이 인상적인데, 그녀가 평소에 잘 키워줄 후계자로 점 찍어 놓은 이네스를 우연히 병원에서(본인은 모친의 병 때문에 들렀나 보죠) 마주친 거죠. "상어떼 근처에선 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머리 회전이 빠른 그녀는 곧바로 이네스를 포섭하여 온갖 특혜를 주기로 전략을 짜지만 이미 한 발 늦었습니다. 혹 시도했더라도 과연 먹혀들었을지는 의문인데, 일을 이름값으로 하는 게 아니듯 지금부터 침몰할 게 뻔한 배에 아무리 일등석이라 한들 누가 올라타겠냐는 거죠. 안 보는 새 이네스는 로펌 핵심 포스트에 소문을 퍼뜨려(표면상으로는 걱정하는 척 "요즘 어쩐지 전에 없던 실수를 하시더라니,... 아프셨던 거에요 글쎄.") 사라의 운명을 막다른 곳으로 벌써 몰고갔습니다. 그녀의 가장 나쁜 적수이자 성차˳주의자에게 말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헌데 기적은 그런 운명의 반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볼 한 가지 가능성이 그녀들의 심안 앞에 열렸다는 뜻 정도죠. 하지만 진짜 인생 역전 따위보다는, 마음이 새로운 평안을 찾고 자신을 조용히 성찰할 새로운 여유가 생기는 게 진짜 기적 아닐까요? 줄리아네는 가발 제조 원료(물론 사람의 잘린 모발입니다)를 들여올 새로운 루트를 찾는데 그게 인도입니다. 스미타는 신전 앞에서 머리를 모두 밀고 앞으로 딸과 개척할 새 삶의 길을 모색합니다.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가 몇 웅큼씩 빠지는(더불어 자신의 인생 지반도 급속히 침하하는) 사라는 쿨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마도 줄리아네가 새로 개척한 해외 시장 수출품일 수도 있는) 가발 하나를 사서 착용합니다. 그 전에 사라는 머리를 짧게 자르는데, 지금껏 영혼 없는 경쟁 사회에서 꼭두각시마냥 폭주한 자신의 인생이 어쩌면 진정한 가발, 위장이 아니었는지 씁쓸히 반추하는 중입니다. 이 순간에도 vulture처럼 그녀를 노리는 사나운 스캐빈저나 포식동물들은, 가장 잘나가는 로펌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꿰차고 앉았던 그녀를 급습하려는 의도로 눈빛을 번득입니다만, 이제 처음 어른이 된 사라는 태연히 창 밖을 응시합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죠.


세 갈래 길
국내도서
저자 : 래티샤 콜롱바니(Laetitia Colombani) / 임미경역
출판 : 밝은세상 201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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