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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서평]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 거장들의 인터뷰

by 쓸쓰 202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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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삶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다."


마케팅 (혹은 어느 부서라도) 담당자들이 치밀한 기획 끝에 소비자, 시장의 심판을 받는(선택이 되느냐 안 되느냐) 바로 그 순간을 두고 "moment of truth"라고도 부르죠.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다들 희망 섞인 관측도 하고, 대박 치면 앞으로 뭘 하겠다느니 잔뜩 부푼 포부를 재미 삼아 털어놓기도 합니다. 잘 될 수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이때 환멸이 깨진다는 이유에서 저런 말을 쓰는 건데, 여튼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작건 크건 환상을 품고 삽니다. 반면 남의 삶에 훈수를 둘 때에는 그렇게 현실적이고 정확할 수가 또 없습니다.


이 책은, 우리 같은 범속한 이들이 아나라, 나이 지긋이 드신 작가분들께서, "인생에 대한 환상이 서서히 사라져갈 무렵" <ZEIT>誌와의 인터뷰에 응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갖가지 속 깊은 상념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생의 후반기 온갖 영욕과 쓴맛 단맛을 다 겪고 "무엇인 인생인지"에 대해 담담한 관조가 가능한 문인들의 말씀이기에, 설혹 젊은 독자들이 읽어도 깨우치는 바가 많을 뿐 아니라 심금을 울리는 진정 가득한 명언이 많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늙는 것은 죄악이다." 하 이런! 예전에 문인 전혜린은 "서른 그 추함을 어떻게 견딜까."라는 명언을 남기고 죽음을 택하여 전설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늙건 젊건 범속한 우리들은 "Life goes on."을 되뇌며 각자의 일상에 그래도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 말을 (인터뷰에서 한) 쥘리앵 그린은 프랑스 태생 미국인 소설가입니다. 인터뷰 중 부친에 대해 언급하며 "남북전쟁(미국 내전) 참전"이 나오기도 하는 건 이 때문이죠. 유난히 전쟁과 정치, 강대국의 횡포에 대한 평가가 많이 나오는 인터뷰 중 "이라크" 이야기는 2003년 부시 행정부 관련이 아니고 1990년의 걸프전을 환기하는 의도이니 우리 독자들은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린은 1998년에 이미 타계한 분이니까요. 참고로 저 말은 늙음에 대한 경멸과 가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이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재고해 보자는 촉구에 가깝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와, "사는 게 다 죄지요." 중 후자에 더 가깝다고나 할지요.


"Kehrdiannix!" 행동주의 문학을 옹호한 페터 륌코르프는 "당신이 이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이란 전제를 달며 자신의 "초연함, 냉담함"을 표현합니다. 역주에 "신경쓰지 마"라는 독일 북부 방언이라고 친절한 설명이 있죠. 더 상세하게는 이게 니더작센에서 자주 들리는 표현입니다. 이거 원 말은, "Kehr dich(2인칭 친칭 명령) an nichts!"죠. 빨리 말해서 저리 들리는 걸 아예 관용어로 굳게 한 건데요. 우리말로 하면 글쎄... "쫄지마" 정도? 영어로 하면 Back off from nothing 쯤 될 겁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컨테이너선은 갈수록 배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지고, (사회의 부속으로 편입되는) 우리들은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진다.(p71)" 음울하지만 삶의 씁쓸한 요체를 제대로 파악했지 싶은 그의 명언이더군요.


"영어는 동사, 독일어는 명사, 러시아어는 형용사" 안드레이 비토프는 세류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변함없는 모성으로서의 러시아적 정신 탐구에 헌신한 작가입니다. 인터뷰는 푸틴 체제가 슬슬 제 꼴을 갖춰갈 무렵인 2004년입니다. 단 저 말은 비토프 본인의 창안이 아니라, 세간에 그런 평가가 있다는 걸 떠올려 주면서 자신이 그에 대해 열렬한 동의를 보낸다는 걸 재확인하는 멘트입니다.


인터뷰어 이리스 라디쉬의 "의견, 평가, 정리"가 더 의미심장한데, 그녀는 "... 그 말씀은, 유럽은 이미 수명이 다했고 러시아는 아직 살아갈 날들이 남았다는 뜻인가요?"라고 묻습니다(p97).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비토프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질문이 나오나 하실 수도 있겠으나, 비토프의 규정이 무엇이었든 관계 없이(!) 의미심장한 통찰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이는 "러시아가 옳고 유럽이 그르다." 같은 가치 판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러시아는 도스토예프스크의 맥락에서 여전히 "타락하고 추접스러운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쇼펜하우어적 의미에서(혹은 니체) "생명력"이란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이 책 제목을 들여다 보십시오.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삶은 정의롭고 가치로 가득찬 것이어서 오래 지속되고, 죄의 응보 때문에 돌연 종지부를 찍는 게 아닙니다.


조지 타보리도 예전 분이긴 하나 이 인터뷰는 04년에 이뤄졌고 이분이 워낙 오래 산 분이라서인지 글과 (우리 한국 독자 사이의) 감성적 갭이 그리 크지 않게 느껴지더군요. "OO 말인가요? 우리는 그 말을 아무데서나 함부로 내뱉지만, 본래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요(이거는 제가 중학교 때 국어쌤도 그런 말을 하던데). 나에게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아흔 둘의 나이에 아이를 만드는 일을 저질렀답니다." 이 말을 인터뷰에서 할 당시의 타보리도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독일식 햄 요리가 맛이 끔찍하다고 불평하시네요. 우리도 요즘 굴라시 메뉴를 취급하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습니다만 이분이 헝가리 분입니다. 젊어서 얼마나 풍미 이슈에 까다롭게 구셨을지도 짐작이 가고 말이죠.


"나는 히틀러를 직접 보았습니다. 1933. 1 빌헬름 슈트라서의 어느 발코니에 서 있던데 무척 슬퍼 보이더군요.(p117)." 누군가의 표정이 어둡거나 밝거나 단호하거나 불안하거나 한 건 제 생각으로 대체로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린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두고만큼은 타보리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슬픈"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세계와, 자신과, 보편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스스로의 운명을 잘 알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G E 레싱의 <현자 나탄>에 대해 말하며 (그 앞에서) 느닷 TV의 의의에 대해 논하는 건(타보리와 라디쉬 모두), 이분이 본디 텍스트와 공연예술 모두로서의 "연극"에 엄청 열정을 쏟은 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도, 혹은 잠시라도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닌지 절망에 빠지고 두려워집니다." 문인에게 있어 집필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들 역시 익숙한 루틴의 그 무엇이 빠져나가면 잠시라도 당혹감에 압도됩니다. 데리다, 베케트, 롤랑 바르트, 조르주 바타유 등의 작품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저런 공황 상태에서 특히 그랬다는 뜻이겠죠?)고 고백하는 마이뢰커는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으며 으레 그런 분이겠거니 짐작했던 대로 섬세하고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의 결을 인터뷰에서 무시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꽤 재미있습니다. "(그럴 때) 글을 쓰는 건 당신인가요, 당신의 자아인가요?" 라디쉬는 저 위(이 책 맨처음) 쥘리앙 그린의 말("내 글은 누군가의 말을 받아적은 것들이다")을 상기하며, 이 질문을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린의 인터뷰는 1990년대 중반에 이뤄졌고 지금 이 만남은 04년 중에 이뤄졌습니다(간접으로 차이트 지의 연륜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이제 중견을 넘어 거물 대접을 받는 라디쉬는 저때만 해도 30대 아니었겠습니까). 이 질문에 마이뢰커는 "나도 에른스트(에른스트 얀들)이 내 귀에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이로는 (아직도 생존해 계신) 마이뢰커가 얀들보다 한 살 위입니다. 아쉽게도 얀들과의 인터뷰는 이 책에 없습니다. 이 이슈는 마치 18세기의 괴테가 말한 "데몬"을 떠올리게도 하네요.


이 책에서 우리 한국 독자들이 가장 유의깊게 볼 만한 대목은 귄터 그라스와 마르틴 발저의 조인트 인터뷰입니다. 두 분이 동갑이고 문예나 사회 활동에서 (누구나 다 알듯) 평생의 동지로 살아왔습니다. 책에는 2015년 그라스의 서거를 회고(우리 한국에서도 당시 큰 반향이 일었죠.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에게 특히 의미 깊은 문인이며, 1989년에 드디어 해금된 영화 <양철북>도 많이들 아실 겁니다)하는 라디쉬의 건조한 듯 의미심장한 감회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참 멋진 말씀이, "아우슈비츠가 도덕적 곤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입니다. 아니, 그 전에, 도덕이 곤봉 노릇을 하면 이미 그건 도덕도 아닙니다. 간혹 우리는 엄혹한 위기의 시대에는 정작 숨어서 뭘 했는지 모를 사람이, 투쟁과 고난을 거쳐 다 이뤄진 밥상에 날선 목청만 높이며 숟가락만 올리려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논리의 비약도 심하고 매사가 견강부회인데다 인성도 참으로 거칠고 나쁜, 그러면서도 간악한 거짓말쟁이더군요.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시도는 대개 도덕과 무관한, 추악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비뚤어진 영혼의 흉계가 그 이면에 깔려 있기 십상입니다.


책은 (섬세한 기획의 결과물이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할 연령의 문인들만 만나, 치열한 언어와 투명한 통찰로 그들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라디쉬의 "맹활약"이 오히려 더 볼만합니다. 인터뷰 앞에는 라디쉬 본인의 "회고, 감상"이 일일이 정성스레 쓰여졌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라디쉬의 책이라 불러도 될 듯합니다. 인터뷰의 질은 인터뷰어의 공력과 천재성에 전적으로 좌우된다고 봐도 되는데, 이 책은 정말 흔한 인터뷰의 범주를 넘어선, 그 자체로 힘찬 미학과 지긋한 교훈, 멋진 감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삼가(그러나 자신 있게) 권합니다.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국내도서
저자 : 이리스 라디쉬(Iris Radisch) / 염정용역
출판 : 에스 201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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