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p35 -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중략) 평등을 총량이 정해진 권리에 대한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누군가의 평등이 나의 불평등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은 상대가 평등해지면 곧 나도 평등해지는 것이 더 논리적인 추론인데도 말이다.
소수자, 인권, 차별 등을 연구해온 저자의 조각 같은 문장들이 정연하다. 선량한척 소수자와 타인의 존재를 패싱하는 평균적인 밑바닥의 관점을 조목조목 잡아낸다. 평등의 권리를 마치 식민지로 여기며 강제 점유하려는 사람들.
이 여름에 하나의 책을 지목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고르겠다.
p200 - 모든 사람이 부정부패에 가담하면 자정이 불가능해지듯 더 많은 사람들이 차별에 동참함으로써 공동체를 잠식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결정장애 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것을 지적 받은 일을 계기로 시작했다는 이 책이 내게도 그러했듯 ㅡ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p187 -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자신이 평균과 일반적인 사고의 척도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녹슬고 무뎌진 객체인지, 자신이 주변을 황폐하게 만드는 고여서 썩은 물이라는 것을, 평균적인 생각의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늘 뒤쳐진 반응들의 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고 부끄럽게 생각하길 바란다.
p99 -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중략)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학력, 능력주의, 성불평등, 소수자, 비정규직, 이민 등 현재의 한국땅을 밟고 사는 사람이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사안들이 쏟아진다.
p197 - 보편적으로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차별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보이게 만들기 위해 차별금지사유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평등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게 오는 것이 평등이다.
개그맨이 흑인분장을 하고 웃기는 것도 누군가에겐 차별이고,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인 다 됐네 하는 말도 차별이고, 퀴어문화제를 불편하게 보는 것도 차별이고,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차별이다.
능력주의관점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올라간 지위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하는 대부분의 말들도 차별이고,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이 커지는 만큼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겨난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았다.
저자가 예로든 화장실 문제는 그야말로 평등에 대한 차별에 대한 생각들을 멘붕에 빠트렸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화장실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화장실이 실제로 이용 가능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화장실이 충분히 가까워야 하고, 진입이 쉬워야 하며, 화장실 안에서 용변과 손세척이 가능하고, 이 과정이 수치감, 불안감이나 위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해야 한다. 이런 조건으로 모든 사람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몇가지의 화장실이 필요할까?
오늘날 익숙한 공중 화장실은 남성용과 여성용을 별도로 갖춘 모습이다. 그 다음으로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건물과 시설에서 장애인용 화장실을 남녀공용으로 한개만 설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녀로 분리된 화장실도 사실상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 젠더 여성의 경우, 여자 화장실에서는 사람들이 남자라고 생각해 무서워하고 거분한다. 반면 남자 화장실에서는 여성스러운 외모때문에 본인이 성폭력의 두려움을 겪는다.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성별의 전형에서 벗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이 안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그럼 이제 화장실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상충되어 보이는 논쟁들 속에서 모두에게 평등한 화장실을 만드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저자가 말하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선 실질적 평등의 길은, 다양서을 모두 포함하는 보편성을 찾는 길은 너무나 멀어만 보인다.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화장실 문제만 해도 '뭘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 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 되버린다.
소수자가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가시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 평등을 쟁취하려는 의도이다. 집단의 차이를 강조할 수록 차별이 고착될 것 같기도 한 '차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서로 다른 위체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 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 으로 옮기는 것이다.
법이 우리의 모든 일상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래서 교육, 고용, 서비스와 재화의 이용과 같은 공식적인 부문에서 일어나는 차별이 주로 규제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일상의 미세한 차별적 시선이나 행동은 규제보다는 체계적인 교육으로 바꾸고, 사회 전반을 검토하고 구조적인 차별을 개선할 수 있도록 제도적 골격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그중 하나로 우리가 서로 차별을 '하지' 않게 만들자는 즉각적인 해법이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선량해도 차별주의자는 차별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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